등록 : 2009.08.18 21:04
수정 : 2009.08.18 21:04
|
김별아 소설가
|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라! 그 진실만은 가르치고 싶었기에, 아이를 이끌고 낯선 동네로 이사했다. 가파른 산언덕에 자리한 대안학교가 허울뿐인 공교육과 미쳐버린 사교육에서 벗어나 가쁜 숨이나마 토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소설가 하성란은 이것을 보고 맹자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나와 닮았으리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맹모삼천지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터인즉, 내가 그 여인과 닮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작 내 아들은 아성(亞聖) 맹자보다 ‘맹한 아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식 자랑은 불출이라면서도 누구라 할 것 없이 슬금슬금 제 자식 자랑을 입 밖에 흘리기 마련이지만, 나는 의외로 공평무사해서 그런 게 잘 되지 않는다. 아이는 그저 평범하다. 어린이집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자기 편이 이기는데도 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을 만큼 경쟁 자체를 싫어한다. 결정적으로 사내아이의 자신감과 친교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운동신경이 둔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줄지어 하는 집단체조와 서열의 도장을 팔뚝에 쾅쾅 찍어주는 100m 달리기가 열리는 운동장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뭇가지로 땅이나 파고 앉은 아이를 보며 속상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를 보면 좀 위로가 될까 싶어 만사를 제쳐놓고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다.
사실 나는 기질적으로 비관주의자라 맹자의 성선설보다는 순자의 성악설을 믿고, 기대가 없어야 실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도사리곤 한다. 공교육에서 벗어나 사교육 포기 각서까지 쓰고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낼 때에도 엄청난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유토피아는 애당초 없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갈등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다만 조금 덜 다치고 조금 더 사랑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처음 참관한 대안학교의 체육대회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것들과 전혀 달랐다. 아이들이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전적으로 주도한 그것에 교사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 아이들이 선배 말이라면 깜빡 죽었다. 통제 없이도 질서정연하게 아이들은 열심히 놀았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감동시킨 장면은 피구 경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어쨌든 팀별 경쟁이니 승부욕이 없을 리 없다. 상대팀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량이 뛰어난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경기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격과 수비가 이어지던 중, 공격을 하게 된 아이들이 잠시 공을 잡고 멈칫댄다.
“야! 쟤 아직 공 안 던져봤어. 이번엔 쟤한테 기회를 줘!”
아이들이 공을 돌리고 있었다. 한 번도 공을 잡아보지 못하고 뒷전에서 어물쩍대는 친구들에게, 남들보다 좀 못한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들은 승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배려와 존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성인들이 아니었다. 내가 농담조로 반인반수(半人半獸)라고 부르곤 하는 질풍노도기의 남자 중학생들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교육이, 교육환경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어여쁜지 가슴 뭉클하게 느꼈다.
현실의 분노와 고통 속에서도, 그래도 아이들이 희망이다. 오늘 괜한 삽질을 하면 내일 아이들이 메워야 하고, 오늘 물러서면 내일 아이들의 행군이 길어진다.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어 성선설을 믿어볼까 한다. 우리의 미래와, 그 알알한 희망이란 이름을.
김별아 소설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