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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21 20:20 수정 : 2009.08.24 09:43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김대중 전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위독한 병세가 알려지면서부터 늘 조마조마했었는데, 홀연히 가셨다는 것이다.

서거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내게 떠오른 것은 그의 모습이 담긴 세 장면이었다.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던 모습, 일본 도쿄대학 연설 장면, 그리고 서울대 문화관 강연 모습이다. 지난 5월,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던 DJ의 모습에는 민주주의, 평화, 인권 등 그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의 후퇴에 대한 격정적 울분이 담겨, 보는 이의 마음이 사뭇 아팠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연단 위의 그는 얼마나 달랐던가.

2005년 5월 23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열린 김 전대통령 강연은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1973년 도쿄에서 그가 납치되었을 때 구명을 위해 애썼던 도쿄대 강상중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일본 내 진보지식인들이 납치사건 30주년을 기해 추진하다가 2년 후에 성사시킨 행사였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외국 국가원수가 야스다 강당에서 연설하는 것은 초유의 일이라 했다.

나는 관련 심포지엄의 발표자였던 덕에 꽤 앞쪽 자리에서 연설을 듣는 행운을 누렸는데, 그는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었고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30년 전 독재정권의 피해자로서 초췌한 얼굴로 일본 언론에 등장했던 그가 이제 남북한 정상회담의 주역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최상의 의전 아래 일본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각국 외교사절을 비롯해 수많은 저명인사가 강연을 경청했다.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화해・평화에 관한 그의 연설은 1500여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탁월한 유머감각을 발휘하였기에, 강연장에는 큰 웃음꽃이 피어오르곤 했다. 고난과 죽음의 고비를 헤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의 말 하나하나가 큰 감화력을 미쳤다. 청중이 느끼는 감동의 기운, 국제사회가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기운이 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일 년 반 후 다시 김전대통령의 강연을 접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던 때였다. 미국 부시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전면제재론을 언급했고 국내 보수인사들은 전쟁불사를 외쳤으며, 일본에서는 재무장론이 더 요란해졌다. 이 상황에서 10월 19일에 그가 서울대 문화관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남북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변함없는 신념으로 역설했고, 납치당시의 상황을 비롯한 자기 생애의 경험도 구수한 입담으로 술회했다. 이 강연은 곤란한 상황에 놓였던 당시 참여정부의 남북대화 및 인도적 대북지원 정책을 위해 든든한 원군역할을 했다.

백미는 후반부였다. 이 날 수많은 학생들이 통로에 빼곡 서서 강연을 듣고 있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DJ가 자리에 앉지 못한 학생들을 연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학생들은 연설자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의자에 앉은 DJ는 그들에게 약간 몸을 기울인 자세로 이야기를 하였다. 이십대 학생들과 여든이 넘은 노정치인은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손녀가 정담을 나누듯, 아주 정겨운 자세로 마주보며 강연회를 이어갔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베어들게 하는 분위기였다. 평화와 대화를 강조하는 그의 연설이 젊은 세대에게 각별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명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토록 빛나던 DJ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어두워져 갔다. 그 높은 연세에도 외국인들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젊은 세대를 열광케 하는 능력을 가졌던 그가, 우리 사회의 타락과 야만으로 인한 상심을 이기지 못했다. 국제사회를 향해, 미래의 주인들을 향해 평화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슴 벅찬 가치를 알려줄 인물은 이제 없는 것인가?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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