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5 20:08
수정 : 2009.08.25 20:08
|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
세상읽기
화해와 용서를 강조한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한 것에 대하여 일부 보수집단의 반응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 예의는커녕 증오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거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너무 다르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며 공과(功過)를 동시에 지니고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특정인의 좋은 점이나 나쁜 점만을 강조하면서 평판이 극단으로 갈린다. 더욱이 이런 극단적인 찬양이나 그에 못지않은 비이성적인 폄하에 있어서 양쪽 모두 상대방에게 적개심마저 보인다. 크지도 않은 나라의 인접한 두 지역에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양쪽의 완고함에는 대책이 없을 정도다.
한 집단의 주장만이 있는 전체주의 사회보다 다양한 견해가 존중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서로 견해차가 있기 때문에 시끄러울지는 몰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것이며, 이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 사회에서는 좌파건 우파건 양쪽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국민과 국가를 위하려 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 이때 좌우의 날개는 국민의 삶과 사회 발전이라는 몸통의 양쪽에서 같이 움직임으로써 추진력이 되며, 이는 어느 한쪽 날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현 정부 들어서 공생보다는 가진 자들에 대한 정책과 더불어 종교 편향 문제, 미국 쇠고기 수입 사태, 용산 및 쌍용차 사태, 일방적 미디어법 통과, 국장에 대한 극단적 비난에서 보듯이 오직 대립과 증오가 가득하다. 차이의 인정이나 소통의 의지는 없이 철저히 상대를 응징하려는 적개심으로 가득 차서 국민의 삶은 사라지고 몸통 없는 양쪽의 날갯짓만이 공허하다. 이제 의견 제시는 상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비난과 정죄의 목소리이고, 서로의 차이는 풍요로운 다양성의 근거가 아니라 차별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위해 좌우의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발전을 위한 견해차가 결과적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피폐하게 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이 되었다. 다양성 존중이나 차이에 대한 관용이 사라지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은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여 상대방에 게 증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며 우리 사회는 진정 추락하고 있다. 차이를 통해 서로 보완하고 같이 발전하기보다는 무조건 좌우 혹은 진보와 보수 등으로 범주화시키고, 또한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를 매도하는 일반화의 오류 속에서 일반 국민의 생활과 삶은 상실되고 사회적 고통은 커져만 간다. 양쪽이 지닌 공허한 완고함으로 인해 이렇게 추락해 가는 우리 사회, 분명 떨어지는 것에는 몸통이 없다.
국민들의 냉랭한 시선과 더불어 현 상황의 극복에는 대화와 소통 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여야는 이제 모두 화합과 대화를 말한다. 그동안 소통을 거부하고 옹고집으로 일관하던 정부도 전 대통령의 국장 수용을 포함해 그나마 타협과 관용이라는 몸짓을 한다. 하지만 이런 정치권의 모습이 당장의 상황 모면이나 앞으로 치를 선거를 위한 또다른 공허한 말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서로 보여주어야 한다. 맺은 자가 푼다는 의미에서 정부는 언론 장악 시도나 ‘피디수첩’ 고소에 대한 재고와 더불어 노사갈등 해결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실제적인 조처를 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지역 갈등을 떠나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성숙한 사회를 위해서 더이상 좌우 갈등 속에 우리의 삶이 추락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