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별아 소설가
|
괴테는 말했다. “여행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나는 돌아왔다. 애당초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여행길이 우리 역사에서 벗어나 남의 역사의 흔적을 좇아 헤매는 일이 되고 말았다. 찜통 같은 난징의 한낮에 서성(書聖) 왕희지의 고거를 헤맬 때, 지인의 문자 한 통이 황해를 건너 날아왔다. ‘DJ, 오후 1시43분 서거!’ 누군가의 교활한 수사인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서늘하게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호텔방의 텔레비전 앞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일은 낯설고 먹먹했다. 어쩌자고 현장에서 한 시대의 저물녘을 회억하지 못한 채 남의 집 불구경하듯 국제뉴스로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단 말인가? 이 부박한 생에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일을 겪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믿는 나는, 그 후로도 한동안 이방의 땅을 떠돌며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지를 곱씹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2000년 전 오나라와 월나라의 치열한 쟁투 속에서 복수를 부탁하고 죽은 합려의 무덤 앞에서 ‘뱀이 자기 머리로 자기 꼬리를 무는 것’과 같은 역사의 쳇바퀴를 상기했고, 명 태조 주원장의 효릉과 그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다가 토사구팽당한 대부호 심만삼의 수묘 앞에서는 떠나기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터뷰에서 읽었던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길항관계를 떠올렸다. 역사는 장강처럼 흘러 천년에 다시 천년이 갔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하던 황제의 권력도, 시대를 풍미한 영웅도, 미색으로 한 나라를 고꾸라뜨린 요부도 세월 속에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지금도 삐걱거리는 채로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10년은, 아니 100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찰나일 뿐이다. 풍진 속에 분분히 떠도는 티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이 관우와 더불어 최고의 명장으로 숭상하는 남송의 장수 악비(岳飛)의 묘 앞에서 그 짧은 한순간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확인한다. 현실에서, 그는 졌다.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고 주전론을 외쳤던 악비는 투옥되어 끝내 독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한편 주화론의 선봉에서 타협을 주장하며 악비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회(秦檜)는 20년간 재상 자리를 꿰어차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예순여섯에 천수를 다했다. 역사가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다면 악비는 다만 고집불통의 이상주의자일 뿐이고 진회는 명민한 현실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후대는 악비의 묘 앞에 진회를 꿇어앉혔다.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이 생뚱맞다 싶더니, 등 뒤로 포승에 결박되어 쇠창살 안에 갇힌 간신들의 철상에는 후손들이 뱉은 가래침이 흥건하다. 진회의 이마는 누가 망치로 내려쳤는지 땜질이 되어 있기까지 하다. 수백년이 아니라 수천년이 흐른대도 역사의 심판은 이토록 무섭고 냉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왜 통쾌하기보다 착잡할까? ‘미래의 복수와 승리가 현실의 모욕과 패퇴를 보상할 수 있는가?’ 악비의 묘 앞을 서성거리며 나는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되뇌었다. 수수께끼의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눈을 부릅뜨리라는 각오쯤은 할 수 있었다. 핍박당하는 악비와 승승장구하는 진회를 지켜보는 일마저도 피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 있었다. 문상도 못 가고 맘껏 슬퍼하지도 못한 채, 악비의 묘 앞에서 중얼거렸다. 지켜볼 것이다.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무한한 역사 앞에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는지도 모른다. 김별아 소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