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9.29 19:49
수정 : 2009.09.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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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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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된 분노의 분출이었던지 착한 사람들과 못된 시비를 벌이고 온 뒤, 반성 모드로 배를 깔고 엎드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내온 통지서를 들여다본다. 질병의 조기발견과 생활습관의 개선 처방을 위해 도입된 맞춤형 검진프로그램, 생애전환기 검사를 받으란다. 위암, 유방암, 대장암, 간암, 자궁경부암… 빼곡히 적힌 병명들이 우연히 들른 소도시 번화가에 늘어선 간판들 같다. 익숙하고도 낯설고, 낯설고도 익숙하다.
그런데 위협적인 병명들보다 더 눈길을 잡아끄는 건 ‘생애전환기’라는 단어다. 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 고비’는 35살인데, 건강보험공단에서 말하는 ‘생애전환기’는 만 40살과 66살이다. 삶의 방향이나 상태가 다른 것으로 뒤바뀌는 시기, 한 번쯤 왔던 길을 톺아보고 가는 길을 헤아려봐야 할 때가 닥쳐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공적인 명칭치고는 꽤 그럴듯한 정서적 울림이 있다. 생애전환기, 무엇을 바꾸거나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인가?
건강검진 통지서 한 통에 마음이 나부룩이 가라앉는 건 나이를 먹어간다는 데 대한 새삼스런 아쉬움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계절이 사색과 관조의 가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얼마 전 두 건의 부음을 받았다. 망자는 모두 40대였고, 생전에 의기 왕성한 사업가였다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미성년인 자녀를 비롯한 유족의 황망함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거니와,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지인들의 심정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왜냐고 따져 묻는다고 하여 왕복차표를 발행하는 법이 없는 인생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스스로 떠난 이들을 이해할 방도는 없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최고로 인구 10만명당 26명에 이른다는 평균 자살률의 통계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이론대로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을 분류해 현상 뒤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해 보아도 지독한 고독 속에서 마지막 결단을 해야 했던 개인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나버렸다. 생애의 전환기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하지만 유별나게 망자에게 관대한 한국적 정서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부음의 주인공들이 결코 패배자나 겁쟁이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건강한 생활인이었고, 충실한 가장이었으며, 산업화와 민주화와 외환위기라는 시대의 격동을 헤쳐 온 주역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돌이켜 물어본다. 어쩌면 그들은 무기력하거나 나태했다기보다 ‘너무’ 열심히 살려고 했기 때문에 그토록 도저한 절망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서양 격언 중에 “사람은 자기의 부모보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더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그들의 등을 떠민 것은 깊은 절망이라기보다 섣부른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발전과 성장의 조증(躁症)을 앓았던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희망에 대한 과다한 열망, 좀더 잘 살고 싶었던 욕망.
어린 날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상상하기 싫었던 바로 그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엔 스스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불혹해야 한댔다. 하지만 수상한 시대, 우울한 세태 속에 어른들도 때때로 길을 잃는다. 큰 재난이 닥쳐오면 각자 날아오른다는 속담을 따라 그저 각각이 잘 견디자고 말해야 할까? 피와 오줌보다 먼저 검사해야 할 것은 덧없이 부푼 욕망과 혼돈된 가치는 아닐까? 세상에 난 지 꼬박 마흔 해 되는 날, 생애전환기라는 한마디 말이 무겁고, 무섭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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