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01 16:25
수정 : 2009.10.0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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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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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포고복(含哺鼓腹)-잔뜩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이다. 중국의 고대 성군 요임금은 천하가 정말 잘 다스려지고 있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민들이 사는 거리로 미행을 나갔다가 어느 노인이 나무 그늘에 앉아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내가 배부르고 즐거운데,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비로소 기쁨의 미소를 띠면서 “이제는 되었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함포고복은 이상적인 정치를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백성들이 의식주에 근심이 없고 태평하고 행복한 생활에 만족하여 임금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의 세상, 바로 그것이 정치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다.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송편을 나누어 먹고 성묘를 하며 오순도순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명절, 그러나 서민들의 실상은 함포고복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격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데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수입상품의 공세와 재벌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영세자영업자들이나,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막다른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다.
이는 몇몇 통계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8월 현재 영세자영업자와 그 가족종사자의 수는 565만명인데 이는 1년 사이에 36만명이나 줄어든 수치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자료를 보면 영세자영업자의 67%는 적자상태로 간신히 영업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최근의 부동산값 폭등으로 상가임대료가 대폭 올라 영세자영업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3월 조사된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537만명으로서 1년 전에 비해 26만명이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월평균 임금 총액은 138만원으로서 전년 대비 겨우 2.2% 올랐는데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임금이 줄어든 셈이다. 정부가 정한 올해 4인가족 최저생계비가 133만원이므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의 수입으로는 가족의 최저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셈이다. 영세자영업자 및 그 가족종사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를 합치면 1100만명이나 되며 그 가족까지 합치면 30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국민의 과반수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상태인 셈이다. 과연 정부는 이들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어떠한 대책을 세우고 있을까?
텔레비전에선 연일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인사청문회 광경이 생중계되었다. 인격이 고매한 학자로만 알았던 신임 국무총리는 자문료·용돈(?) 등의 명목으로 기업에서 수천만원을 받았는가 하면 소득세 누락 신고, 다운계약서 작성, 위장전입 등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장관들 역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어린 자녀들에 대한 증여세 탈루 의혹이 속속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은 국회 내에서 다수의석을 가진 여당의 지원으로 문제없이 인사청문회 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다. 평생 가도 땅 한 평, 주식 한 주 살 여유가 없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과연 이번 청문회 풍경은 어떻게 비쳤을까?
2009년 추석을 맞는 대한민국에서는 분명 함포고복 격양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다수 서민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몇몇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부르는 노랫소리이다. 진정한 의미의 함포고복 격양가는 언제나 되어야 들을 수 있을까?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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