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09 18:30
수정 : 2009.10.0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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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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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 이주호 제1차관은 복 받은 사람이다. 그가 펴낸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놓은 교육 분야 핵심 공약 몇 가지는 대선 1년 전 발간된 이 책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교육인적자원부를 구조조정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 개편해야 한다’고 썼는데, 지금 그는 자기가 이름까지 지은 조직에서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다. 국어·영어·수학의 비중이 늘어나고, 예체능 교과를 사실상 퇴출시킬 거라는 우려가 드높은 이른바 ‘미래형 교육과정’에 대한 구상도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명박 정부 대입제도의 근간이 될 ‘입학사정관제’에 대해서도 학교 정보 공개를 통해 학교 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내신제도와 맞물리게 해야 한다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가 강조했던 자율형 사립고는 올해 상반기에 이미 20곳이 지정되었고, 기존의 특목고와 내년부터 실시되는 서울시의 고교선택제와 맞물리면서 고교 평준화는 마침내 숨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하나, 일제고사와 학교별 성적 공개만 남았다. 오는 13~14일 196만의 학생을 대상으로 일제고사가 치러진다. 이르면 내년 연말부터 학교별 성적이 인터넷으로 공시되고, 2011년부터는 전년도 대비 향상 정도까지 공시된다. 우리 공교육에 그나마 ‘공’(公)자를 붙일 수 있게 해주던 마지막 판도라의 상자가 활짝 열리고, 이제 모든 학교는 꽁지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내달리게 될 것이다.
올 2월, 교과부가 지난해 10월 치른 일제고사의 지역별 성적만 ‘살짝’ 공개했는데,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중학교가 일제고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방학중 보충수업, 중학교 야자, 초등생 모의고사, 우수학생 포상금 지급, 초등 0교시, 놀토 수업, 예체능 수업 축소와 국영수 문제풀이, 일제고사 내신성적 반영까지 몇 달 사이 벌어진 파행의 목록은 읊기에도 숨이 차다. 여기에 강원도교육청이 일제고사 성적 향상에 공로가 있는 교사들에게 남태평양 팔라우 여행권을 선물하겠다고 한 소식을 고명으로 얹으면 상다리가 휘어지는 밥상이 된다.
2010년 연말 무렵, 그해 치른 일제고사의 학교별 성적이 학교알리미 사이트에 공시되면 어떻게 될까. 며칠 안으로 그 학교의 전국 순위까지 인터넷에 뜰 것이다. 그리고 몇 해 뒤에는 일제고사 성적이 그 학교가 속한 주거지의 등급까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영국이 꼭 그랬다. 일제고사와 성적 공시는 이미 영국에서 그 파행의 전모가 드러났고, 영국도 미국도 일본도 이제 되돌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용감하게 이 대세를 거스른다. 아마도 사실상의 교육대통령인 이주호 차관의 소신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국단위 일제고사와 성적 공시의 당위성을 여러 차례 힘주어 언급했고, 17대 국회의원 시절 이른바 ‘학교정보공개법’의 제정을 주도하여 오늘날 이 일제고사 체제의 주춧돌을 놓았다.
내가 그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일제고사와 성적 공시로 교육 현장은 돌이킬 수 없는 파행 속으로 빠져들 것이고, 이로 인해 아이들은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이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고사가 아니라도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크기는 이미 그 임계점을 한참 지나지 않았는가.
이 사태는 이명박 대통령과 교육 관료들, 이를 막아내지 못한 우리 교사·학부모·시민들의 책임이지만, 가장 큰 책임은 이 체제를 구상하고 실행한 주역인 이주호 차관에게 있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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