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20 21:18
수정 : 2009.10.2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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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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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재(三才)’라 불렸던 벽초 홍명희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인물이다. 3·1 운동과 신간회 사건의 투옥 경력을 지닌 열혈한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인 <임꺽정>을 (당시)<조선일보>에 10년간 연재하며 단 한 편의 소설로 문학사에 확고한 지위를 마련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려한 이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홍명희가 당대 인물들과 맺은 교우 관계다.
역사가 신채호와 홍명희는 은근한 경쟁 관계였다. 추레한 외양에 괴팍한 성품을 가진 신채호가 누더기 이불을 덮고 잠든 모습을 본 홍명희는 신채호 같은 사람을 유학 보내면 조선의 망신이라고 험담했다. 언젠가 팔씨름 시합이 벌어졌을 때에는 홍명희에게 진 신채호가 분을 참지 못해 뛰쳐나가 돌을 주워 들고 돌아오기도 했다.
“내가 벽초에게 지다니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신채호가 씩씩거리며 내뱉은 말에 대한 홍명희의 답변.
“저런 사람인 줄 알면서도 이겨버린 내가 잘못이지!”
그래도 걸출한 두 인물의 우정은 깊고 진했다. 홍명희는 신채호의 글을 자신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동아일보>에 지속적으로 게재했고, 각자 옥고를 겪는 중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운명이 정한 길로 가는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홍명희의 인간적 비범함은 이광수와의 우정에서 더욱 빛난다.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그들은 서로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하지만, 이광수는 끝내 친일의 대표인사가 되어버렸다. 이광수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며 구구절절 이름의 의미를 설명한 대목은 지금 봐도 눈물겹게 인상적이다. 차라리 송병준처럼 “조선 이름은 촌티가 난다”고 간단히 말했으면 나았을까? 결국 이광수는 한국전쟁 중 납북되다가 심한 동상에 걸려 사경을 헤매며 홍명희를 찾고, 홍명희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내 이광수를 병원으로 옮긴다. 홍명희는 이광수를 ‘친일분자’이자 ‘반혁명분자’로 보기 이전에 재승박덕한 친구로 생각했던 것이다.
새삼 벽초의 일화를 들추는 것은 얼마 전 받은 한 통의 메일 때문이다. 한국작가회의 충북지회에서 보내온 메일의 제목은 “홍명희 문학제를 함께 지켜주십시오”였고, 그 내용은 14년간 벽초의 고향인 괴산에서 진행되던 문학제가 보훈단체의 방해와 기관의 압력으로 예산 3000만원이 전액 삭감되어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 정부의 눈엣가시인 방송인들이 줄줄이 퇴출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사회단체가 정부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돈에 대한 욕심이 세운 돈에 빠삭한 정권이니 돈을 이용한 통제에 놀랍도록 탁월하다.
그런데 일련의 사태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원한이나 분노 같은 게 아니다. 무력을 이용한 공안 통치가 주었던 두려움도 없다. 가슴속에서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는 것은 혐오, 그리고 황당함과 짜증이다. 하도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기에 대체 10년 사이에 그들이 아닌 사람들이 얻은 게 무언가 톺아보니, 아, 우리는 어느새 세련된 감각에 익숙한 쿨가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난 6월 젊은 작가들의 ‘한줄 선언’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다름 아닌 시인 곽은영의 “촌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였다. 이성보다 감각이 먼저 이 시국에 진저리를 친다. 70년 전에 쓰인 <임꺽정>은 ‘조선의 정조(情操)’를 간직한 여전히 세련된 소설이다. 그런데 70년 후에 쓰이고 있는 이 소극의 대본은 촌스럽기가 어느 고릿적 감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손발이 절로 오그라든다. 촌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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