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05 21:47
수정 : 2009.11.05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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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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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날이 제법 차다. 내일이 입동이니 가을도 끝물이다. 남녘의 산록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지난주 점심 무렵 산길을 걷는데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춰졌다. 하늘은 쨍하니 파랗고 단풍은 빨갛다 못해 검붉고, 비껴드는 오후 햇살은 눈에 시어 차마 바로 보지 못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문득 지난해의 오늘이 지금 이 순간과는 달랐듯 내년의 오늘도 지금과 같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또 반백년을 살아오면서 맞았던 가을날들 가운데 어느 하룬들 같은 날이 있었으랴 싶었다.
생각은 또 훌쩍 뛰어 사람이 제대로 산다는 것은 매순간을 살아-버리는 것, 즉 태워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순간도 같은 때가 없다면 제대로 사는 삶이란, 순간마다 다른 뜻을 맛보며 사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후회 없이 산다’는 말도 순간순간을 태워버리듯 살아버려,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이 ‘살다’라는 말과 태운다는 뜻인 ‘사르다’가 같은 계열의 말이라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나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 활동인 먹는 일조차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오후에 할 일을 걱정하고, 저녁밥을 먹으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밥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먹는 순간을 제대로 ‘살아버리지’ 못하고 밥은 밥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각각 분리되어 버린다. 이때 밥은 사람을 위한 한 먹거리에 지나지 않고, 식사 시간은 다음 할 일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추락한다. 이런 밥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랴.
<중용>에서 “먹고 마시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건마는, 제맛을 알고 먹는 사람이 드물다”라는 말도 이 대목에서 뜻이 깊다. 정녕 누구나 밥을 먹고 살아가긴 하지만 끼니마다 먹는 밥맛이 다 다름을 느끼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밥 먹을 때는 말이 없었고 잠잘 때도 말이 없었다”(食不語, 寢不言 <논어>)는 공자의 삶은 ‘밥맛을 제대로 알고 먹으며 사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먹고 잘 때 말이 없었다’는 것은 먹고 자는 일 그 자체에 오롯이 하나가 되어, 먹을 때는 ‘먹는 사람’이 되고 잠잘 때는 ‘잠자는 사람’이 될 뿐이라는 뜻이다. 먹고 자는 일이 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결되었다는 것.
삶의 기본 활동인 먹는 일이 이럴진대 공부인들 또 뭐 다르랴. 평범한 일상(먹고, 마시고, 잠자기)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일상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가 공부의 올바른 시작이다. 무엇을 ‘위하여’ 먹고, 내일을 ‘위하여’ 잠자는 것이 아니라 먹을 때는 먹음 자체가 되고, 잠잘 때는 잠자기 자체가 되는 법을 배워서 익숙해지는 것이 참된 공부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공부가 무엇을 ‘위하여’ 행하는 노동으로 타락한 지 이미 오래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하여 공부하는 식이다. ‘위하여’ 하는 공부는 노동이지 참된 공부가 아니다. 공부 자체에 오롯이 빠져들어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버리지 못하고, 바깥에서 공부의 겉을 핥는 셈이다. 이런 공부가 어찌 피곤하지 않으랴.
며칠 후면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시험이 치러진다. 수험생들은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위하여’ 하는 모든 일에는 불안과 초조의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다만 이 통과의례를 겪고 난 다음날,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참 공부를 시작하기 바란다. 기쁨과 즐거움은 그 무엇을 위해서도 또 미래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이 순간의 ‘나’를 오롯이 살아버릴 때에야 피어나기 때문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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