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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10 22:57 수정 : 2009.12.10 22:57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한국 영화 중 걸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다.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는 좁고 어두운 아파트 골방에서 죽음 같은 삶을 이어간다. 어느날 공주는 외부세계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잡게 된다. 가족한테서도 버려진 공주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더이상 ‘루저’일 수 없는 양아치 종두다. 종두의 도움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공주, 지하철 안 휠체어에 실린 공주의 뒤틀린 몸과 그 위로 오버랩되어 너울거리는 환희의 몸짓은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한 자유인의 기쁨을 감동스럽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 기쁨만큼이나, 세상으로부터 따돌려지고 버림받은 장애인의 깊은 절망을 전해준다.

영화 밖 장애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장애인이 갑작스런 사고와 질병과 같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연유로 장애를 얻는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 아주 인색했던 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학교와 일터에서는 이들의 장애를 탓하고 외면한 것이 우리네 풍토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장애인을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 삼기보다는, 우리 삶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이런 태도는 우리의 윤리관과 무관치 않다. 때로 고상한 철학이 비뚤어진 윤리의식을 버텨주는 구실을 한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회구성원 행복의 총량을 극대화하는 것을 사회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벤담의 주장은 현대 사회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 벤담식 사고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이 때문에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다수자 집단이기주의의 논리가 되기도 하였다. 취약계층을 돕는 분배가 성장의 걸림돌이라는 성장지상주의 논리의 뒤편에는 성장의 과실을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자리잡고 있다. 장애인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다수자중심주의의 횡포 또한 공리주의로 점잖게 정당화된다.

공리주의의 패권에 반기를 든 것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 존 롤스였다. 불평등은 사회적 약자의 이익에 도움이 될 때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이 분배의 새로운 원리가 되었다. 취약계층 보호를 우선하는 것이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 원리라는 롤스의 생각은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회정의론의 부활로 이어졌다.

현대사회 윤리관의 변화는 남의 나라 사정만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에 대한 학대와 차별을 고치겠다는 우리 사회의 자각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제 장애인에 대한 횡포는 윤리적 비난은 물론 법적인 심판까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차별을 없애는 것만으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달리기 경주에 참가할 자격을 주는 것만으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대등한 경주를 할 수는 없다. 장애인의 불리한 여건을 보상하는 사회적 지원을 크게 늘려 출발선이 동등한 경기가 되도록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모든 정당과 후보가 장애연금 도입을 약속함으로써 평등과 우애 사회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후 2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장애연금의 입법이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정부의 법안은 중증장애인만을 대상으로 지금의 장애수당에 2만원만 얹은 액수를 지원하는 내용으로 마련되었다. 이런 ‘무늬만 연금’이 장애인들의 분노를 사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장애연금이 거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양식과 의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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