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13 22:19
수정 : 2009.12.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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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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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10년의 마지막 해가 저문다. 새 천년을 맞은 설렘이 엊그제인데 시간의 빠름은 전광석화 같아 벌써 새 세기의 10분의 1, 새 천년의 100분의 1을 앗아갔다. 누구와 함께 다음 세기 세계와 한국의 운명과 희망을 말할 것인가? 이 아침 10대, 20대와 나누고픈 물음이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세계와 동아시아와 한국은 격변하였다. 거함 중화제국은 영·미·러·일 열강 11개국과 불평등조약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마침내 붕괴하였고(1901), 중화체제 해체와 함께 사상 최초로 동아시아의 패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중국을 대체하려 동아시아로 향하던 제국 러시아는 일본에게 허망하게 패퇴하였고(1904-05), 반대로 미국은 포츠머스조약과 태프트-가쓰라조약을 통해 ‘대서양 제국’을 넘어 ‘태평양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점점 겸장하여갔다. 또한 영국과 일본은 1, 2차 영-일동맹(1902,1905)을 통해 중국과 한국에서의 특수 이익을 서로 보장하였다.
태프트-가쓰라조약과 영-일동맹이 만나자 역사상 최초로 유럽-미주-동아시아 패권국가의 글로벌 조합, 즉 미-영-일 동맹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미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떼어낸 일본은 태프트-가쓰라(7월), 2차 영-일동맹(8월), 포츠머스조약(9월)을 통해 세계 3강 미·영·러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받은 뒤 을사늑약(11월)을 통해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모두 1905년 4개월 동안의 사태 전개로서, 훗날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1953년과 함께 1905년은 현대 한국의 국제적 명운을 가른 가장 결정적인 해였던 것이다.
21세기 첫 10년의 기축 흐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의 부상, 유럽의 통합, 미국의 조락, 셋으로 모인다. 특히 중국의 부상은 미-중 양강 체제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가치·힘은 20세기 초와 역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다. 중국 부상과 미국 조락의 파급 효과로 인해 일본은 20세기 초를 반면하고 있다. 사실상 제2의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이었던 미-일동맹 체제하에서 안주·발전해온 일본은 최근 반대 방향에 근접한 노선으로 동아시아를 격동시키려 한다. 미-일동맹 틈새 형성과 일-중 협력, 이는 한 세기 전 미-영-일 동맹체제 형성 및 중국 붕괴 노선과의 평화로운 전변을 뜻한다.
20세기 초엽 동아시아 질서의 상전벽해를 맞아 최익현·유길준·안중근·이승만·신채호는 각각 자강, 문명개화, 주권과 동양 평화, 국제화·서구화, 민중적 민족주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다. 이들의 비전은 당대 일본과 중국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쑨원, 루쉰에 결코 못지않았다. 게다가 웅혼한 기백, 민중 사랑, 치밀한 논리를 보여주는 ‘독립정신’ 저술, ‘동양 평화’ 구상, ‘민족 논설’ 설파 당시의 이승만(1875), 안중근(1879), 신채호(1880)는 ‘고작’ 20대였다.
청년의 때에 특히 삶이 어려운 오늘, 가슴을 활짝 열어 멀고 깊고 긴 호흡으로 넓은 세상을 보자. 20세기 초 선각들의 고뇌를 이어받아, 21세기 세계와 한국을 더욱 평화롭고 인간적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청년들의 가슴은 좀더 뜨거워지고, 시야는 좀더 넓어지며, 지식은 좀더 연마되어야 할 것이다. 저 선각들이 품었던 민중 사랑, 세계·동양 평화, 자기존중을 향한 꿈과 헌신을 다시 맞는 격변 앞에서 깊이깊이 묵상해보자. 누가 21세기 안중근이 되고, 누가 21세기 독립정신을 집필하고, 누가 신채호의 웅변을 토해낼 것인가? 청년의 시기가 특별히 어려운 이때 오히려 능히 세계와 전체를 감당하려는 배포를 가져보자. 그것이 청년기의 우리를, 나아가 한국을, 그리고 동아시아를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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