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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18 19:35 수정 : 2009.12.18 19:35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09년 한국 사회에는 정말 큰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용산참사,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표류하고 있는 세종시 문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반성하게 만드는 4대강 사업 문제 등등. 온갖 사건과 논란이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사안이 어린이들에 대한 성폭행 문제다. 남자아이에 대한 성폭행도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가 여자아이들에게 가해진 성적 가해이다. 사회가 미쳤다고 할 정도로 피해 어린이의 나이도 낮아지고, 가해의 성격이나 정도도 끔찍해지고 있다.

이런 사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나영이’ 사건의 경우, 사건이 워낙 엽기적이고 비인간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공분을 느꼈다. 가해자에게 선고된 형량이 지나치게 적다고 느끼자 온 사회가 들고일어났고 대통령까지 이에 대해 발언했을 정도였다.

이에 반해 한 달 전에 언론의 보도가 있은 후 지금은 잊혀가고 있는 일이 있다. 열 살 난 여자아이가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그가 이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자, 아이 어머니가 선처를 호소했고 아이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아이 어머니는 가해자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막 출산해 누워 있는 참이었는데, 선처를 호소한 근거도, 이 어려운 형편을 참작해 달라는 것이었다.

상황론에 동조하면서 법적 규정 때문에 형량을 크게 경감해줄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주변에는 이를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는 피해자인 아이의 처지는 거의 고려되지 못했다. 아이가 선처 호소에 동참했다지만 이는 사실상 어머니 의견에 종속된 것이었다. 아이 어머니는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해자의 부인이기도 했는데, 이 중에서 가해자 부인의 입장에 선 것이다. 어머니는 남편이 출감하면 그와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그에게 경제적으로도 의존할 것을 전제로 했다. 피해자인 아이의 자기결정권이 가해자의 부인에 의해 묵살된 사례인 것이다. 그동안 반아동 성폭력 문제에서는 가해자 처벌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심지어 화학적 거세론까지 일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인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며 어떻게 상처를 넘어설 수 있을지 보살피는 일이다. 성폭행범인 의붓아비는 아이에게서 영구격리되어야 하지, 아이와 다시 일상생활을 함께 하게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피해자를 경제적 부양자였던 가장에게서 격리시키고 보살피는 일은 사회적 비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제도적으로 이런 비용을 치를 준비가 없었기에, 가장이라면 성폭행범이라 할지라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견에 무덤덤한 시선을 보낸 것이다.

아이 어머니는 전형적인 ‘매 맞는 아내’의 태도를 보였다. ‘매 맞는 아내들’은 많은 경우, 일상적 가정폭력에 길들여진 채 심리적·인격적 독립의 의지를 상실해 간다. 우리 사회가 공격적인 일상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에게 제도화된 사회적 보호망을 제공한다면 그토록 무력한 인격적 예속 상태의 지속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어머니에게도 출산 후 필요한 경제적 지원책을 제공할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면 남편에 대한 의존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무한경쟁 사회는 끔찍한 공격성을 키운다. 누군가의 속에서 들끓던 공격성은 나영이나, 위에서 말한 여자아이 같은 가장 방어력 없는 어린 존재들을 상대로 한 성폭력으로 폭발한다. 이는 거세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상식의 회복을 통해서만 넘어설 수 있다. 짐승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다시, 사회 전체의 건강성과 연대의 문제로 연결된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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