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28 22:15
수정 : 2010.01.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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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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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 벗이 “행복하니?”라는 화두를 던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그래, 행복해!”라고 즉답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허둥대는 찰리 채플린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지, 아니면 컨베이어벨트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지 물을 겨를도 없다. “신성한 노동”을 죽어라고 계속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을 뿐이다.
권력, 부, 지위, 명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삶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들도 타인이 모르는 자신만의 불행이 있다.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진심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힘들어한다. 내면의 공허함이나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또한 생산이나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의 행복수준이 항상 높은 것도 아니다. 일찍이 고 로버트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은 “국민총생산(GNP)은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G20’ 소속을 뽐내는 한국 사회의 삶이 <아마존의 눈물> 속 조에족의 삶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새해가 되어 이렇게 행복론을 말하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고 팍팍한 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불행한 강자나 부자도 있다”고 말하며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지 않던가. 강자나 부자에게도 불행이 있지만, 이들은 그 불행을 상쇄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또 한국 사회가 조에족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몽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사회의 컨베이어벨트의 속도는 즉각 대폭 줄여야 한다. “게으를 권리”를 승인하고, 하루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을 실현해야 한다는 폴 라파르그의 오랜 염원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한국은 최장의 노동시간,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복지수준을 기록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통계 앞에서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은 무색하기 그지없다. 이 통계를 변화시키려는 정책 없는 ‘선진화’ 운운은 가소롭다. 사실 “게으를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일자리가 생겨나 “일할 권리”도 늘어난다. 일전에 우석훈 박사는 생태와 행복을 희생하는 토건경제를 비판하면서, “섹스 많이 하는 나라를 만들자”라는 얼핏 보기에 생뚱맞은 제안을 하였는데, 그 기본취지에 공감한다.
한편 초보수준의 복지만 이루어져 있는 우리 사회를 두고 ‘복지병’ 운운하는 주장이 있다. 가당찮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은 ‘성장중독증’이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이루어졌을 때 그 나라의 부는 현재 한국의 부보다 적었다. 한국은 이미 ‘부자나라’이며, 더 많은 여가, 휴식, 오락, 복지를 위한 토대는 마련되어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을 3만달러로 만들 때까지는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돌아다닌다. 이런 그럴싸한 ‘행복유예론’에 더이상 속아선 안 된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부와 성장력을 가지면서도, 구성원이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쉬고 놀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형성한 나라가 여럿 있음을 기억하라.
문제는 “게으를 권리”와 행복의 제도화를 이루어내고 발전시킬 정치적·사회적 세력이 취약하다는 점에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을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행복 증진을 국가·사회의 제1목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행복동맹’의 형성과 발전,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희망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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