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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02 20:12 수정 : 2010.02.03 14:49

김별아 소설가

아침 밥상머리에서 불퉁거리고 나간 아들에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조상님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알랑대는 화해 문자를 띄운 뒤, 인터넷 메신저를 켜놓은 상태에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바빠?”

메신저에 유일한 ‘친구’로 등록된 동생에게서 문득 쪽지 한 통이 날아왔다.

“자는 거 아니야?”

전형적인 올빼미족으로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동생의 습성을 알기에 이상타 생각하면서도 무심히 답장을 써 보냈다.

“혹시 지금 인터넷 벵킹 가능해?”

그런데 어쩐지 맞춤법을 틀리는 꼬락서니부터가 심상찮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체, 돈, 인터넷뱅킹 등의 단어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사기를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뜨기에 의도적으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틀린다고 한다.)

“왜?”


“급하게 이 체할 데가 있는데 인터넷 벵킹이 안돼서....... 200만 대신 넣어줘. 내일 바로 갚을게.”

‘훌륭한 거짓이 서투른 진정에 못 미친다’는 한비자의 말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이처럼 서투른 거짓으로 사기를 치려는 작자가 한심하다 못해 안쓰럽다. 아무리 사기꾼이 다스리는 사기꾼들의 천국이라도 ‘잃어버린 10년’하고도 한참 전에나 통했을 법한 구태의연한 사기술에는 욕지기가 난다. 창조적인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참신할 수는 없는가? 가뜩이나 진부한 말바꾸기와 연막전술에 질려 있던 참에 울컥 역증이 치밀어 사기꾼의 내공을 시험하며 좀더 희롱해볼까 했던 생각을 포기해버린다.

“너, 누구냐?”

그 한마디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리어왕, 아니 어리보기 사기꾼은 잽싸게 접속을 끊고 사라졌다. 그 순간 내게 돈을 꾸어 달라던 아이디의 진짜 주인인 동생은 야간작업을 마친 뒤 건넌방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엉성한 ‘인터넷 메신저 피싱’이나 ‘보이스 피싱’에 낚이는 피해자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해킹한 아이디로 접속해 아는 사람인 척하며 접근하여 미리 준비한 대포통장에 송금을 받아 가로채는 방식으로 수억원을 가로챈 사기단이 검거되었다는 소식도 들리니 말이다. 동생의 아이디는 지난해 말에 해킹을 당했다고 했다. 부랴부랴 주소록을 뒤져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연락을 취하니 벌써 여럿이 나처럼 낚시꾼을 만났다고 했다. 다행히 그들은 동생의 상황이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엉뚱한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런 어설픈 낚시꾼들이 출몰하는 인터넷의 망망대해가 야릇하게 느껴졌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특정 연령층이나 계층이 아니라면, ‘친구’들은 어쩌자고 아이디와 대화명만으로 익명의 존재를 내가 아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고 계좌이체의 버튼을 누르는 걸까? 전국민이 다 가진 거나 진배없는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만 걸면 인터넷 ‘벵킹’이 안 되거나 보안카드를 잃어버려 쩔쩔매는 친구와 곧장 대화를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언젠가부터 직접통화보다는 문자메시지를 선호한다. 내가 하고픈 말만, 듣고픈 말만,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할 수 있는 초간편 메신저! 대화의 물결과 토론의 파도가 사라진 바다에 남은 건 이처럼 고립되어 둥둥 떠다니는 얼굴 없는 메시지와 그것을 낚으려는 수상한 낚시꾼들뿐이다. 문득 두어 해 전부터 갑자기 싫어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소통’이란 말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사기꾼 덕분에 좋은 일도 있네! 이게 몇 년 만이냐? 우리 연락 좀 자주 하고 살자!”

주소록을 확인하며 소식이 끊겼던 친구들과 통화하는 동생의 등짝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래도 다시, 이 망망대해를 건널 뗏목은 소통뿐인가?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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