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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18 21:28 수정 : 2010.02.19 10:21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방송의 인기 드라마 <추노>를 보면서 2009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가 겹쳐 떠올랐다. <추노>의 등장인물은 각자의 대의, 이익, 원한 때문에 쫓고 쫓기며, 죽이고 죽는다. <박쥐>에서 가톨릭 신부에서 흡혈귀로 변해 버린 ‘상현’은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추구하며 ‘태주’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지만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마치 두 작품은 다름 아닌 21세기 한국 사회가 쫓고 쫓기는 ‘추노 사회’, 피를 빨고 빨리는 ‘흡혈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루쉰이 <광인일기>에서 봉건 중국 사회를 ‘식인 사회’라고 통렬히 비판한 것처럼.

전국 곳곳에서 ‘최소운영수입 보장제도’와 결합되어 진행되는 민자사업,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는 국채발행은 국민의 세금을 빨아먹는 ‘국가적 흡혈’이다. 이와 별도로 사회 곳곳에도 체계적·조직적 추노와 흡혈이 이루어지고 있다. 힘 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배운 자는 못 배운 자를, 자본가는 노동자를, 대기업은 하청기업과 동네 상인을,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수도권은 지방을, 남성은 여성을, 한국인 전체는 외국인 노동자를 추노하고 흡혈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가 아닌가.

이렇게 우리는 먹이사슬의 아랫사람을 추노하거나 흡혈하면서 살고 있다. 게다가 추노하면서 느끼는 강자로서의 쾌감, 흡혈귀가 되어 얻게 되는 놀라운 능력에 미혹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자신도 무참하게 추노당하고 흡혈당할 수 있음을 잊은 채 말이다.

권력의 살수(殺手)가 되어서라도 승자의 반열에 오르려는 ‘황철웅’, 어쭙잖은 완장을 차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오포교’, 그리고 억압받는 여자로 살기보다는 흡혈귀가 되어 자유를 얻고 나아가 폭압자로 군림하고 싶은 ‘태주’ 등은 모두 우리의 안과 밖에 존재한다. 냉소와 분노에 찬 ‘이대길’이 세상을 향해 내뱉는 말, “조정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는 익히 듣는 얘기이다. 반정(反正) 또는 혁명을 통하여 신분제를 없애려고 목숨을 거는 ‘송태하’, ‘업복이’, ‘초복이’의 길, 또는 흡혈의 확대재생산을 막기 위해 자신과 연인을 없애려는 ‘상현’의 길은 어렵고 멀어 보인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 이승에서의 삶 자체가 추노와 흡혈의 순환과 반복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김승희 시인이 1930년대 시인 이상의 시를 빌려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서로를 착취하는 ‘인(人)개미’일지 모르므로.

그렇지만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설화’의 말대로, 센 척하지도 말자. 비정하고 비릿한 추노의 저잣거리에는 종종 좌절하고 타협하고 굴복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풍자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지워지지 않는 노비 문신을 지니고서도 서로 어깨 걸고 어울리며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피 칠갑의 아수라장에서도 고민하고 번뇌하며 산 사람의 피는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흡혈귀, ‘상현’이 있지 않은가. 사랑은 “지독한 혼란”(울리히 벡)이라지만, 주체할 수 없는 정염(情炎)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남녀 주인공들의 모습은 애잔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 ‘태주’는 왜 ‘상현’의 구두를 챙겨 신었을까. 이런 사람들의 고통, 꿈, 투쟁, 사랑이 쌓이고 쌓일 때 세상에는 피와 쇠 냄새보다 살과 젖 냄새가 짙어지는 법이 아니던가.

<박쥐>의 결말은 비극이었고,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추노>의 결말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찰, 연대, 도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리라 믿는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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