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별아 소설가
|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한순간 주변 사람들의 입말에 ‘너무’라는 부사가 그야말로 ‘너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좋아도 예뻐도 ‘너무’ 좋고 ‘너무’ 예쁘다. 즐겁고 만족스러워도 ‘너무’ 즐겁고 ‘너무’ 만족스럽다. 대단히 길지는 않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기간을 영어권에서 살다가 돌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너무’를 영어로 하면 ‘투(too)’인데, 그건 부정적인 뜻을 표현하는 부사다. ‘너무’ 예쁘면 그 미모가 화근이나 근심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너무’ 즐거우면 그러다가 꼴까닥 숨이라도 넘어갈까 불안할 정도라는 뜻이다. 한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일상이 괴로워지기에 이르렀다. 방송에서는 시민들의 인터뷰나 연예인들의 대사에 등장하는 ‘너무’를 순화된 말로 바꾸어 자막을 내보내는 수고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마구 쏟아지는 ‘너무’를 막아내기에 ‘너무’ 버거워 보인다. ‘너무’를 대신할 말로는 ‘정말로’(거짓이 없이 말 그대로), ‘진짜로’(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으로), ‘매우’(보통 정도보다 훨씬 더), ‘아주’(보통 정도보다 훨씬 더 넘어선 상태로), ‘많이’(수효나 분량, 정도 따위가 일정한 기준보다 넘게) 등의 부사들이 있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그 정도의 수식으로는 도저히 차고 넘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게 되어버렸나 보다. 이십여년 전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인간은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한다”는 글귀나, “언어가 정신의 기본”이라는 소쉬르의 명제나, “무의식은 말실수를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떠올려보면, 어느덧 한국인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부정적 표현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긍정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왜곡과 과잉의 사회에서 모국어와 정신이 동시에 시달린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이토록 긍정을 부정으로 치환하는 세상에 도무지 긍정적으로 봐줄 수 없는 긍정이 범람하는 일이다.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캠페인성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공익광고에는 언제나 선량하고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 등장해 보통사람들의 감정이입을 자극한다. 하지만 연기된 보통사람들은 ‘너무’ 선량하고 ‘너무’ 평범해 정말로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며 울화를 돋운다. 복지와 교육에 대한 현실적 문제는 깡그리 무시한 채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씀풍씀풍 낳으란다. ‘법’과 ‘원칙’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가 ‘나 말고 너만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바뀐 게 아닌지 어리둥절한 지경에, 선진국 국민이 되게 해줄 테니 정부만 철석같이 믿으란다. 살리기 전에 일단 죽이고 시작하려는지 지방하천 정비사업에서부터 문제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전광판은 번쩍번쩍 4대강 살리기가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악을 쓴다. 가스요금, 기름값이 무서워 아이가 없을 때는 수면바지와 수면양말로 중무장하고 냉골에서 곱은 손을 불며 글을 쓰는 19세기 작가 놀이를 하는데, 방송에서는 실내 온도가 엄청나게 올라가는데도 계속 팍팍 쓰다가는 언젠가 마음대로 쓸 수 없을 거라는 어이없는 설정의 광고가 나온다. 마음 같아서는 가수 김수희의 창법으로 쓰러지며 소리치고 싶다. 정말 ‘너무’합니다! 노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조그만 생선을 삶는 일’과 같다고 했다. 생선살을 바스러뜨리거나 태워먹지 않기 위해서는 조용하게 천천히 요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 잘 먹고 잘 살 생각 따윈 없다. 그저 ‘너무’ 지치거나 질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의 ‘너무’ 소박한 희망이다. 김별아 소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