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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26 19:07 수정 : 2010.02.26 19:07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내일이 대보름이다. 옛말에 정월 보름날이면 ‘동네 머슴이 문설주에 기대어 운다’고 하였다. 긴 겨울, 농한기라 잘 쉬었는데 이날이 지나면 또 일철이 시작되므로 힘겨운 농사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것이다.

우리 풍습 가운데 이날만큼 놀이와 행사가 많은 절기가 또 있을까. 쥐불놀이가 전야제라면 새벽녘 우물물을 먼저 길으려는 아낙들의 분주한 발걸음은 대보름날의 출발신호다. 그리고 오후의 보름달맞이와 달집태우기는 그 절정이다. 한 해의 바람과 집안의 안녕을 달님께 기원하는 순간, 자연과 사람, 하늘과 땅이 한데 어울린다.

그러나 농경을 잃어버린 오늘날 대보름 행사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터전을 잃어버린 풍속은 제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겉치레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 틈새를 장삿속이 파고들면 전통과 풍속은 돈놀음으로 타락한다. “정월대보름이 다가오자 지역 백화점들은 ‘정월대보름 행사’를 통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는 오늘날 그 위상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곧 대보름은 축제가 아니라 관광이 된 것이다. 축제는 즐거움을 자아내지만 관광은 피로를 낳는다. 관광 속의 행위는 진짜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관광의 요건은 구경거리를 일로 삼는 사람, 곧 관광객이 따로 존재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관광(觀光)이란 ‘풍광을 본다’는 말뜻 그대로 눈의 활동이다.

관광의 눈길은 대개 위에서 아래로, 재빠르게, 거죽만 훑는 것이다. 관광의 이런 특성은 오늘날 구직자들이 학력·학점·토익점수 등을 합친 것을 이르는 말인 ‘스펙’과도 몹시 닮았다.(또 그러고 보니 스펙(spec)이라는 말이 ‘구경거리·쇼’라는 뜻이다.)

관광은 상대방을 사물화하고 내려다보는 눈길일 경우가 많기에 무례하기 십상이다. 특히 오늘날 관광은 대개 버스의 차창이나 카메라의 렌즈를 통과한다. 차창이나 렌즈를 통한 눈길은 더욱 무례하다. 그러고 보면 또 옛사람들이 안경을 낀 채 어른 뵙는 것을 무례한 짓으로 여겼던 까닭을 이해할 법하다.

‘관광농업’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을 민속촌처럼 만들겠다는 짓이나 4대강 개발사업의 진짜 문제가 여기 있다. 농민과 농업, 자연과 생명을 도회지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삶의 활기와 자연의 생명력을 뺏고 그저 사진에나 찍힐 피사체로 소외시키는 짓이기 때문이다. 남해군의 ‘독일마을’이란 곳이 그렇지 않던가. 외국인들을 살게 해주마고 청해놓고는 결국 ‘원숭이 마을’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아무나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이곳저곳 마구 사진을 찍어대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들을 자행하고 있다.

관광의 반대는 순례다. 관광이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순례는 발로 걷는 것이다. 무엇보다 관광과 순례의 차이는 눈길에 있을 듯하다. 관광이 급히 피상을 스쳐 지나간다면, 순례는 천천히 주변과 눈을 맞춘다. 관광이 창을 통해 대상을 객체화한다면, 순례는 객체를 도리어 나의 속으로 안으려 든다.

그러니까 순례가 종교적 행사로, 이른바 ‘평화와 치유’의 걷기로 승화되는 것이겠다. 천천히 걷는 걸음 속에서 자연과 이웃을 내 속으로 끌어들여 소통하고 또 이로써 심신의 평화를 얻고 그 와중에 내 속에 든 갈등을 치유하는 것일 테다.

관광의 눈길에서 사물화·소외화가 빚어진다면 순례의 걸음에서는 ‘함께·더불어’가 파생한다. 그렇다면 순례를 통해 획득하는 자연과 사람의 일체화는 막상 우리네 대보름날 행사 속에서 재현하던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하나 됨과 다를 바 없다. 내일은 봄맞이 삼아 산길이라도 느긋이 걷다가 해 저물 녘에 동쪽 하늘을 쳐다볼 참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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