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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16 20:29 수정 : 2010.03.16 20:29

김별아 소설가





지난주 토요일, 아들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등반대원들과 함께 백두대간 1구간 9정맥 고남산을 7시간 동안 산행했다. 내가 평소 등산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건강하고 건전한 알피니스트였다면 이쯤에서 덧붙일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산사람들의 낙원이라는 네팔, 그중에서도 히말라야 트레킹의 여신으로 꼽히는 안나푸르나의 관문인 포카라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도 단 한 번 산에 올라보겠노라는 작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억지로 등산모임에라도 참석할라치면 남들이 정상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동안 등산로 입구의 먹자골목에서 동동주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앙버텼다. 그러던 내가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걸 뻔히 알면서 어쩌자고 2년 여정의 백두대간 종주에 덜컥 참여했을까?

턱없이 요망하고 괴이쩍은 소리인 줄은 알지만, 치열한 삶과 그 삶 속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도 알지만, 한때 나는 마흔이 넘은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지리멸렬한 도덕과 제도에 붙매인 채 시들부들 늙어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런데 격정과 자멸의 충동으로 들썩이던 청춘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리고, 나는 어느덧 그토록 혐오하던 후줄근한 나이가 되었다. 새삼스레 봄이 좋아지고, 젊은 친구들을 보면 “참 좋은 때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가끔은 ‘꼰대’처럼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 오지랖에 훈수도 둔다. 나날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때로 나이와 상관없이 놀랍도록 활기찬 생을 누리는 어르신들도 뵙곤 하지만, 시시때때로 무겁고 둔하고 비겁해진 내 삶의 자리를 확인하노라면 어린 날의 경망스런 각오가 아예 생억지는 아니었다 싶다.

근래 한동안 대학가에서 “리얼리스트가 되어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라는 경구와 함께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고, 40대에도 마르크스주의자면 바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자는 흔히 체 게바라의 말로 알려진 실제 68혁명 때의 구호이고, 후자는 칼 포퍼의 말이라고들 하나 원문을 알 수 없어 구글로도 검색하지 못한 구비전승의 말씀이다. 나는 후자의 말을 20대에 동맹휴업을 촉구하러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어느 선생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대단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독한 모욕감을 느꼈다. 어떻게 그것이 나약한 지식인의 냉소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40대까지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 그런 소리를 지껄이며 젊은이들을 야코죽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는커녕 무슨 주의자도 될 수 없는 깜냥이란 걸 스스로 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말에 코웃음 한 방 정도는 날려줄 수 있다.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고 상황이 바뀐다고 자신의 뜻과 신념을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는다. 어지간히 청순한 뇌를 가진 요변쟁이, 혹은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는 사이코패스라야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뒤스럭뒤스럭 지랄버릇을 떠는 것이다.

다만, 너무 익숙해진 삶은 짐이 된다. 변화는 두렵고 몸은 무겁다. 이대로라면 어느 시구대로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해야 할 웃짐이 될 것이다. 산을 오르는 내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살아온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는 폴 부르제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이 가파르고 둔중하게 쌓인, 그 산을 넘기로 했다. 넘어야 한다. 비록 올랐다 내려와 한 며칠 이 지경으로 끙끙 앓는다 할지라도, 후회 따윈 없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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