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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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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예슬양의 탈대학 선언문이 충격과 성찰의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을 그만두는 학생은 많았지만, 대학 자체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대학에 도전한 학생은 김양이 처음이다. 대학이나 주류 언론은 이를 묵살하고 있지만 학생, 학부모, 일반 사회는 조용히 그러나 크게 술렁이고 있다. 김양의 선언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김양의 선언문에서 ‘비싼 등록금 내고 다녀봐야 제대로 된 직장 하나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학의 현실’에 대한 반항을 우선적으로 읽어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대학생들이나 졸업생들, 부모들이 부딪힌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등록금과 졸업 후 취업 문제다. 하지만 김예슬양 개인은 명문대학의 최고 인기학과에 다니고 있었기에, 졸업 후의 취업 전망에 목을 매는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오히려 이 젊은이의 선언은 내가 보기에 오늘날 대학의 존재방식에 대해 훨씬 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대학, 도대체 너는 무엇이냐. 너는 사회와 세계의 아픔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라는. 이는 대학의 붙박이 구성원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교수 사회의 일원인 내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동양 고전에서는 대학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고 했고, 서양 중세 사람들은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를 일컬어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 칭하였다. 후자는 배움과 교육, 연구의 공동체라는 법적 지위를 중시하는 말이었다. 근대 대학의 이념을 확립하고자 애쓴 독일 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는 ‘고독과 자유’에서 대학인이 지향해야 할 자세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지배 권력과 속중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율적 개인이 대학 안에서 정신적 자유를 누리며 교양과 인격, 비판적 지성을 연마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교육이 엘리트 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19세기에는 이것이 가능했을까. 오늘날 신자유주의 아래서 대학은 그 자체가 이익추구집단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돈이 있어야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대학은 자본의 영향 아래 들어갔고, 돈줄의 다른 부분을 쥐고 있는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도 비굴해졌다. 대학은 날마다 솟아오르는 최신식 건물들을 자랑하는 대신, 자율성과 비판정신과 기개를 잃어버렸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권력기관이 학생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시국선언 서명 교수들을 대량으로 해직시켰다. 그러면서도 군사정권은 대학에는 살아 있는 정신이 있음을 알았기에 대학인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작년 여름에는 대학교수들이 전국적으로 몇천명이나 시국성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비판했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연구비 몇 푼이면, 건물 한두 동이면 대학 구성원들의 입쯤 잠잠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자본과 권력이 확신하고 있기에 이 같은 묵살이 가능했을 것이다. 대학은 확실히 사회의 존중을 잃어버렸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학 내 민주주의가 말살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결정이 일방적으로 내려져도 이를 막아내지 못하는 대학구성원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김예슬양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비판적 담론과 자기성찰이 사라진 대학의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대학이 삶과 세계에 대한 젊은이들의 도전적 질문과 문제제기를 용납하지 않은 채 취업준비기관, 고시준비기관으로 전락해 있다면 어떤 기백 있는 젊은이가 이곳에 애정을 느낄 것인가. 학생이 대학을 향해 ‘나는 너를 거부한다’고 하는데도, 대학은 굼뜬 공룡처럼 기척이 없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더 많은 젊은 정신들이 대학의 속화된 기풍에 도전하고 나서는 날, 대학은 자기성찰을 향해 눈을 뜰 것인지. 나의 자문은 허공에 던져진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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