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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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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의료보험 개혁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개혁법안의 통과로 4600만 무보험자 중 3200만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해마다 보험이 없어서 죽음에 이르는 미국인이 1만8000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무보험자들이 겪은 고통을 가늠케 한다. 베트남전 때 3년마다 이 정도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잘못된 제도 탓으로 치른 대가가 아주 혹독하였다. 새 법안은 이런 야만에 대한 투쟁 선언이다. 새 의료개혁이 공공보험 없이 민간보험에만 의존한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하지만 오바마 개혁이 민간 보험회사를 정부 규제 안으로 끌어들여 영리 보험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과거 클린턴 정부 의료개혁 당시 한 보수주의 인사는 “개혁안의 성공은 복지국가 정책이 재탄생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며, 개혁된 의료보험에 대한 국민의 긍정적인 체험이 정부의 복지확대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글쎄 오바마 개혁이 복지국가 부활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미국이 시장 만능과 작은 정부를 내세운 레이건주의를 벗어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국은 지난 30여년간 유럽 복지국가와는 다른 발전 궤도를 밟았다. 중산층 소득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상위 1% 부자들의 소득은 두 배가 되었다. 레이건 이래의 탈규제와 감세, 복지 축소가 이런 불평등 증가에 큰 힘이 되었다. 의료 불평등도 심각해져, 1970년대 90%였던 의료보험 가입률이 85%로 떨어졌다. 위기의 뿌리는 직장의료보험을 주축으로 한 시장주의 의료제도에 있었다. 치솟는 보험료로 부담이 늘어난 기업들은 근로자들에게 제공하던 의료보험을 점차 줄였고, 비싼 보험료를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들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통로를 잃었다. 새 개혁안은 정부 개입으로 95%의 보험가입률을 이루겠다는 선언으로, 한 세대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제2의 뉴딜을 시작하였다. 오바마 개혁에 대한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대공황기 루스벨트의 뉴딜이 공공 의료보험 도입에 실패한 이래 이어진 공보험의 공백기에 자리를 잡은 민간보험 체제에서 정부의 의료 개입을 가로막는 강력한 기득권층이 성장하였다.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업계가 단단한 각오로 반대에 나섰고, 직장보험 혜택을 누리는 중산층도 세금부담 걱정에 떨떠름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오바마 개혁의 성공은 개혁세력의 지지세보다는 해법 제시 없이 반대에만 급급했던 시장주의의 무능에 힘입은 바 크다. 어쨌든 개혁법안은 통과되었으나 그 운명만큼이나 기존 제도의 관성을 이겨내고 전환을 이루는 개혁정치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1977년 시작된 우리 건강보험은 단기간에 전국민 보험으로 발전하였고, 국민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복지제도로 자리잡았다. 보험이 빠르게 확장되니 전체 의료비 중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부담분도 계속 늘어, 참여정부에서는 보장성이 65%로 올라섰다. 하지만 건강보험도 전환점을 맞이하여 이 정부 들어서는 보장성이 62%대로 떨어졌다. 명색은 공보험인데 정부는 민간보험식의 당사자 부담 원칙만을 내세워 뒷짐지고 있는 형국이니, 건강보험이 빠르게 늘어나는 의료욕구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 빈틈에서 자라난 민간보험은 건강보험의 절반 가까운 지출 규모로 팽창하였다. 세력이 커진 민간보험이 다시 건강보험의 앞길을 가로막는 악순환이 시작되니, 정부의 방임으로 겪은 미국민의 모진 경험을 남의 나라 얘기로만 돌릴 수 없다. 국민의 의료욕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부의 책임의식 회복이야말로, 의료보장 발전의 갈림길에 선 우리가 오바마 개혁으로부터 배울 점이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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