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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26 19:15 수정 : 2010.03.26 19:15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올해는 유독 봄 날씨가 궂다. 빨래가 마를 새가 없도록 비가 잦다. 부산에서는 한겨울 내내 못 보았던 눈을 삼월 들어서야 보았으니 ‘세월이 거꾸로 가나’ 하고 혀를 찰 만도 하다. 옛사람들 말을 빌려 ‘춘삼월 호시절’이 왔는데도 날씨가 왜 이 모양일까 싶지만, 막상 음력으로 헤아리니 아직 이월 초열흘 어간이다.

남쪽 지방에선 음력 이월을 ‘영등달’이라고 불렀다. 이때 북풍이 불면 바람영등이 내렸다고 하고, 구름이 잔뜩 끼면 비영등이 내렸다고 했다. 영등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영등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하늘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내려와서 23일에 올라간다고 믿었다. 집집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거나 제를 올리며 평안을 기원했던 풍속이 있었다.

그만큼 음력 이월은 궂은 날이 많은 달, 곧 민감한 시절이다. 세월이나 인생이나 겨울에서 봄으로 드는 길목에는 여러 고빗길이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봄기운이 들었다. 목련은 움을 틔우고 있고, 개나리도 비탈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매화는 흐드러져 골짜기는 흰색 파스텔로 환하고, 동백꽃은 온몸으로 툭툭 떨어져 군데군데 봄 땅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하지만 우리네 범인들은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한 채 맞고 보낸다. 내내 날씨가 험하다고 투덜대기나 하고 양력과 음력을 혼동해 예년과 달리 올해 날씨만 궂은 양 입을 삐죽거리다가 세월을 다 보낸다. 반면 시인과 예술가들은 봄을 봄으로 맞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봄이 어제와 다르고, 저녁 무렵 꽃술이 아침의 그것과 다름을 예민하게 느끼면서 산다.

이호우 시인이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개화>)라고 노래한 것은 그가 꽃술의 열림을 온몸으로 함께 느끼며 지켜봤던 표지다. 앙가슴을 열고 기지개를 펴는 꽃잎의 개화 순간과 문득 한 몸이 될 수 있었기에, 그 순간을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가만 눈을 감’았던 것이리라.

또 서양 작곡가 비발디가 계절마다 바뀌는 시절의 변화를 <사계>라는 협주곡으로 펼쳐냈음은 우리도 대략 알고 있는 터. 이즈음 아침 무렵 그의 ‘봄’을 들으며 창을 열면 명징한 봄기운이 와락 몰려들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시인과 예술가들은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민감하게 주변을 응시하라, 예민하게 내 삶을 관찰하라, 그럴 적에야 살아있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노라는 가르침이다.


문득 공자가 민이호학(敏以好學)이라, “민감하게 배움을 좋아하거라”라던 말의 뜻을 이제야 알 만하다. 열린 마음으로 민감하게 대상과 호흡을 같이할 적에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오늘을 내일을 위한 수단으로 밀쳐버리지 않고, 지금 이때를 매 순간 느끼면서 살 때라야 올바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일신우일신’이라,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경지도 여기서 멀지 않다.

그러나 또 인간세상의 봄날은 세월 따라 자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눈귀를 열고 권력자와 금력자의 몸짓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좌니 우니 턱없이 무딘 칼로 종교를 난도질하는 오만한 정치와, 언론의 ‘쪼인트’를 까대는 권력의 행태가 고작 구설이나 설화에 그치는 것이 아님도 아는 것이다. 꽃이 나무의 본색이듯, 말은 사람의 정체인 것.

나와 이웃이 함께 봄바람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사회의 봄은 오지 않는 법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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