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04.06 20:32 수정 : 2010.04.06 20:32

김별아 소설가





절기는 청명과 한식까지 지났는데 일기는 언제쯤이나 봄일까 한다. 폭설과 잦은 비와 흐린 날씨로 햇과일 맛은 밍밍하기 그지없고, 춘곤을 이겨내기 위해 충분히 섭취해야 할 채소의 가격은 혼곤할 만큼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애한 봄기운에 들썽들썽 봄바람이 나도 시원찮을 판에 마음은 자꾸만 낮게 가라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찌푸린 하늘만큼 나라 안이 온통 흉흉하다. 사고가 사고를 덮고, 죽음이 죽음을 덮는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아직도 생눈을 부릅뜨고 있을 듯한 실종자들을 생각하면 무심히 웃다가도 일순 미소가 굳는다. 희생자가 영웅이 되고, 그 영웅이 현실을 장악한 허깨비들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면 비탄마저도 싸늘하게 식는다. 여전히 춥다. 슬픔은 얼음가시처럼 날카롭다. 봄은 쉽사리 와주지 않을 것만 같다.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 보면 홍수와 가뭄, 황사와 냉해 같은 자연재해조차 왕이 부덕한 탓이었다. 대재앙이 닥치면 군주는 반찬 수를 줄이고 술을 삼가며 간곡한 제의를 바치거나,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되돌아오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천재지변마저 하늘이 내리는 경고와 징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옥살이를 하고 있지나 않은지 조사해 방면하고, 음양의 화기가 상함을 걱정해 원한(?!) 맺힌 노처녀와 노총각을 강제 혼인시키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러한 왕조시대의 책임관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대입함은 무리거니와, “나도 한때는… 해봐서 안다”는 기막히고 코 막히는 경험주의를 유행어로 만든 누군가가 부덕과 박덕을 반성하리라는 건 바지랑대로 하늘을 재고 산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안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면, 바야흐로 완벽하게 사랑의 반대편에 터를 닦고 말뚝을 박을 지경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별로 화도 나지 않는다.

지난해 이맘때 썼던 칼럼의 제목이 “목표는 ‘생존’이다”였는데, 한 해가 꼬박 지나서도 그 제목은 절절히 유효하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면, 줄초상의 난마에서도 누추한 삶이나마 견디고 버텨야 한다면, 또다시 역사에 길을 물을 수밖에 없다. 충격요법이자 반면교사로 5세기 중반 무렵 ‘어리석고 어둡고 미친 듯 포악한’ 임금들이 연이어 나왔던 중국 남조의 유송시대를 펼쳐 읽노라니, 문득 지인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그의 화분에 피었다는 양란이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꽃 한 송이가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까요?”

아버지의 능묘를 파헤치고, 쇠창을 들고 다니며 길가의 백성들을 마구 찔러 죽이고, 절에서 키우는 개를 훔쳐 잡아먹는 패악과 패륜을 저지른 왕들이 지배하던 80여년의 세월을 어루더듬던 내가 의심스럽고 쓸쓸하게 물었다.

“꽃이 위로가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꽃에 위로받을 줄 아는 사람이 많아져야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고운 답장을 한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삶과 시간, 삶의 시간을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소제(少帝)의 시절에 태어나 순제(順帝)의 시절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온전히 지옥이자 환란이었을까? 그래도 그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며 오늘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내일을 꿈꾸지 않았을까? 어쩌면 삶은, 인간의 역사는 그러하기에 마땅히 지속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 겨울 땅속에서 숨죽여 있던 알뿌리가 불현듯 꽃을 피우듯, 그 꽃에서 봄을 깨닫고 다시 조심스레 가만히 설레듯.


김별아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