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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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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을 비롯하여 100명 가까운 폴란드 지도층 인사들이 4월10일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카친스키 대통령의 서거는 카틴학살 희생자 추도를 위한 러시아 방문길에 일어났다. 카틴학살이란 1940년 봄, 지금의 러시아 땅인 카틴 숲과 인근 지역에서 2만2000명 이상의 폴란드 장교, 지식인, 지도자들이 소련 쪽에 의해 집단 처형된 일을 말한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오랜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카틴학살은 현대에 이르러 양국 관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이다. 1943년에도 폴란드 임시정부 수반이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이 카틴 방문길에 올랐다가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이륙 직후 일어난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니, 우연의 일치가 놀랍다. ‘세상이여, 이곳에 관심을 가져 주시오’라는 카틴의 격렬한 절규가 이 같은 일들을 잇달아 부르는 것일까. 중동부 유럽의 강자였던 폴란드는 18세기 후반부터 분할되어 주변 세 강국에 종속되었는데, 그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폴란드는 러시아 혁명 후 독립했지만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불안한 생존을 이어갔고, 마침내 2차 대전 발발 후 인류사 최대의 비극적 현장의 하나가 되었다.(아우슈비츠도 폴란드에 있다) 대전 직전인 1939년 8월, 히틀러 정권과 스탈린 정권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는데, 그 비밀 의정서에는 독일이 폴란드 영토를 차지할 경우 소련이 이 나라의 동쪽 절반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들어 있었다. 실제로 그 직후 나치 군대는 폴란드를 공격하였고, 곧이어 소련 군대도 폴란드 국경을 넘어 들어갔다. 그리고 소련 군대는 민족의식을 고취할 만한 폴란드 엘리트 수만명을 체포하여 소련 영토 내 포로수용소에 가두었다. 이어, 소련 내무인민위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의 재가 아래 폴란드 포로들에 대한 집단처형을 주도했다. 1940년 4월부터 카틴과 인근 지역에서는 매일 밤 유혈 참극이 벌어졌다. 소련 지도부가 참극을 묵인한 것은 강력한 독립 폴란드의 재건을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련은 사망자들을 집단매장한 후, 1943년 현장이 드러나자, 나치 독일군이 가해자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미루었다. 1941년 여름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양국은 최대 적국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종전 후 진실 규명을 계속 요구했고, 마침내 1990년 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카틴학살이 소련 쪽에 의해 저질러졌음을 인정하고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의 반성이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충분치 않아 보였다. 사실, 카틴학살은 엘리트집단의 제거를 통해 한 민족의 생존능력을 말살하려는 행위에 가깝고, 체계적·의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인종학살) 개념에 부합한다고 볼 소지가 크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노사이드 개념의 적용을 거부하고 있고, 일부 러시아인들이 다시 카틴학살의 소련 책임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폴란드 내에서는 카틴 문제의 전면적 재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카틴에서 희생자 추도의식을 받든 지 사흘 만에 카친스키 대통령의 비보가 전해진 것을 보더라도, 카틴은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 정부가 카틴학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폴란드인들을 향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국제사회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침, 카친스키 대통령의 비보 후 러시아가 조의 표명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폴란드인들의 마음을 녹이고 있다 한다. 두 나라 국민들이 이 비극을 계기로 화해와 우정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기원한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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