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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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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백년간 닫혀 있던 부산의 서면 부근, 하얄리아부대 터가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지역신문은 감격스러운 필치로 이렇게 쓰고 있다. “마침내 하얄리아 부지가 24일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미군이 1950년 9월 이 땅을 점유한 이후 59년 동안, 일제강점기를 포함하면 100년 동안 도심 속 ‘금단의 땅’으로 자리했던 하얄리아 부지가 시민들의 발길을 허락하는 것이다.”(<부산일보>) 본시 이 땅은 드넓은 논밭이었다. 행정지명으로 ‘동래군 서면’에 속한 곳이었다. 주변의 연지(蓮池)라는 지명에서 보듯 큰 저수지를 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부터 남의 땅이 되고 말았다. 지난 백년의 역사를 추억하자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경마장으로, 2차대전 기간에는 일본군 훈련과 야영지로 사용됐다. 1945년 해방 후 주한미군기지사령부로 쓰였다가 한국전쟁 뒤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설치됐다. 그 후 내내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하얄리아(Hialeah)는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당시 미국 초대 사령관의 고향이었다고 전한다. 하얄리아는 인디언 말로 ‘아름다운 초원’을 뜻한다고 한다. 연지-경마장-하얄리아라는 접속되지 않는 이름들의 중첩에서 이미 우리 현대사 백년의 굴곡을 엿본다. 연지가 전통을, 경마장이 군국주의를 표상한다면 하얄리아는 서양을 상징한다. 전혀 다른 지향의 틈새에서 많은 이들이 찢기는 고통을 겪었던 터다. 허나 이것이 어찌 이곳만의 슬픔일까.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금방 우리가 서양을 뜻하는 접두어 양(洋)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삶의 기반인 의식주가 모두 그러하다. ‘양복’과 ‘양장’을 차려입고, ‘양식’을 먹으며, ‘양옥’에서 살아가는 우리 처지가 그렇다. 하얄리아로 상징되는 서양문명을 북극성으로 삼아 그들의 본을 뜨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지식인 프란츠 파농이 식민지 사람의 특성으로 묘사했듯, ‘흑색 피부’에 ‘백색 가면’을 덮어쓰기를 안달하며 달려온 세월이었다. 이제 그 백년의 꿈이 이뤄져 서양은 일상의 중심에 자리잡았고 외려 전통적인 것들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급기야 서양 것은 ‘양’이라는 거추장스런 접두어를 떼고 일상용어가 된 반면, 이 땅 본래 것들은 외려 접두어 ‘한’자를 덮어써야 하는 모양새가 그런 처지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서양식 의사는 ‘양의사’에서 ‘의사’가 된 반면 이 땅의 의사들은 ‘한의사’라고 해야 알아듣게 된 모양이 그러하다. 그런 예를 들자면 어디 한둘일까. 이 땅의 본래 음식은 한식으로, 우리 과자는 한과로, 우리 옷은 한복으로, 우리 집은 한옥이 되었다. 여기 접두사 ‘한’은 결핍과 소외의 언어다. 한복은 평생 한두번 입을까 말까고, 한옥은 이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체험하는’ 집으로까지 오그라들었다. 스러져가는 인간문화재처럼 특별한 배려가 없다면 곧 사라질 것들의 이름 앞에는 ‘한’이라는 접두사가 붙어 있다.
그러나 또 극즉퇴(極則退)라, ‘만물은 극에 달하면 돌아온다’고 하였던가. 일본이 대륙침탈의 전초지로 삼았고, 미국이 극동전략의 기지로 삼았던 남의 땅이 오늘 우리 땅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귀환을 새로운 백년의 출발로 삼고 싶은 것은 부산 사람들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온고지신’이라, 전통을 익히고 또 새것을 배워 더욱 성숙하는 새 시대의 출발점이길 기원하게 된다. 이런 눈으로 보자니 지난해 하얄리아부대 앞에 부산국악원이 들어선 것도 오늘따라 더욱 의미 깊게 와 닿는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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