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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14 22:33 수정 : 2010.05.14 22:33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지난 주말 내성천을 다녀왔다. 이른바 ‘4대강 사업’으로 이곳이 훼손될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함께 내려갔다 온 것이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옛 향교 앞에서 하차한 후 회룡대에 올랐다가 반대편 가파른 산길을 허적허적 내려와 보니, 눈앞에 펼쳐진 회룡포 여울은 맑고 투명하기가 여전했다. 미끈한 복주머니 모양으로 펼쳐진 너른 금모래밭과 안쪽 둔덕을 휘감아 싸며 담담히 흐르는 물줄기를 보니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승무를 추는 젊은 비구니가 연상되었다. 그리운 사람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져 아파 누워 있을까봐 헝클어진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난 괜찮아’ 하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는 심정이랄까. 일행인 젊은 학생들은 여울에 들어가 까르륵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물장난을 하건만, 나는 어두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것은 단아하고 산뜻한 이 절경도 어쩌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대강 사업 구간에 든 지역의 자연파괴는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안동 북쪽,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있는 구담습지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안심할 수 없다. 구담습지는 수달·비오리·원앙 등등 온갖 야생동식물이 공존하는 천혜의 생태계 보고로서 지난해 이맘때 그곳을 지나올 때에는 동행했던 지인이 저 멀리 휙 스쳐 지나가는 생물체를 보며 “저거 노루 아니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조차 4대강 사업 권역에 들었다가 거센 반대에 부닥쳐 직접적 사업대상에서는 제외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인근에서 진행될 사업으로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누구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미리 알고 죽기살기로 반대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 어떤 자연파괴가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이 파괴를 어떻게 미리 알고 모두 막아낼 수 있는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여주 강천보 건설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성천 맑은 물을 눈망울에 담고 오던 일행은 이를 보고 아연실색하는 빛이 역력했다. 천혜의 절경이건 문화유산이건 생태계 보고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군대까지 동원해 둔치며 습지며 금은 모래밭을 이렇듯 파헤치다니 가히 토건파시즘 세력에 의한 자연학살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북송의 시인 소식(소동파, 1037∼1101)은 그의 절창 <적벽부>에서 “천지 사이 사물에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나의 소유가 아니면 단 한 터럭도 취하지 말 것”이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조물주의 다함없는 보고이니 “그대와 내가 함께 누릴 바”(而吾與子之所共樂)라고 했다. ‘그대와 나’란 오늘 이 순간의 나와 내 눈앞의 당신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이 땅 위 뭇존재들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 개념은 전 우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위정자라 하여 자연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음은, 그가 인간 개개인의 영혼과 내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한한 권력을 쥔 유한한 인간이 미래의 생명들의 신성한 거처를 왜 파괴하는가?

2년 전 많은 시민들은 정부가 국민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있다.

이토록 수많은 시민, 종교인, 지식인들이 반대하는 사업이라면 적어도 삽자루를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어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민주주의의 문제요 인권의 문제다. 만인의 경관권, 환경권, 자연과의 공존권을 침해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이야말로 사회 구성원 전체의 마음의 복지에 관련된 사항이니, 진정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할 문제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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