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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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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아직도 추억에 젖은 광화문 촛불시위와 보수가 목에 핏대를 세우는 천안함 사건. 이 두 사건은 매우 다른 이슈 같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가치로 수렴된다. 자유민주주의. 촛불시위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이해와 대처는 그 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수준을 정확히 보여주는 리트머스 테스트이다. 그런데 한국의 주류 보수는 두 사건의 대처에서 영화 <괴물>이나 <하녀>에서의 천박한 인간 군상과 매우 닮아 있음을 무심코 드러내고 말았다. 첫째 촛불시위. 과거 민주 대 반민주의 시절 ‘전대협 진군가’를 작곡한 이가 오늘날 민주공화 시대에 만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작곡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 지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보주의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그 노래와 당시 시위는 진보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합리적 보수도 상당 부분은 공감할 수 있는 초당적인 자유민주운동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시조들이 그토록 원한 것이 민주공화국 운동이 아닌가? 이제 진보도 본격적으로 같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급진 좌파는 그 시위를 중산층의 명품 시위라고 싫어하고 나라사랑의 언어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시위 덕분에 쇠고기 수입조건이 더 엄격해졌다. 말하자면 국익을 위한 상원 외교위원회 구실을 대신 수행했는데, 대통령은 의정비를 지불하기보다는 오히려 혐오감으로 응답했다. 5·18 기념식에서 배제한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훨씬 보수적인 함의를 가진 노래인데 말이다. 설마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모른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아는 보수 정치는 한국에서 힘든 것일까? 쇠고기 위생조건 개선의 선구자이자 생태주의자이고 문어발 기업 규제론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처럼 필자가 존경하는 위대한 보수 대통령은 한국에서는 진보정당 당수 취급받기 십상이다. 루스벨트처럼 수백 가지 꽃과 곤충의 이름을 외울 때 가장 행복해하는 보수 대통령이란 이미지는 물신주의 종교를 숭배하고 토건국가인 한국에서 참 낯설다. 둘째 천안함. 냉전론의 가장 위대한 보수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도 한국에서는 보수 정당에서 자주 눈총을 받는 불운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미국 냉전 노선의 대설계자이자 냉전의 종언을 예견한 조지 케넌 말이다. 케넌의 탁월한 보수주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팽창주의적 소련 제국의 본질을 이해했고 미국이 이기는 길은 단호함을 유지하면서도 히스테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강점인 자유민주의 활력을 지켜내는 것임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악당 조커의 진정한 목적이 단순히 권력 유지나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고담시를 괴물로 만드는 것임을 배트맨이 간파한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다른 하나는 핵 군비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발적 전쟁의 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는 보수 본류답게 때로는 강경한 노선을 고집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핵무기 중독 신드롬을 끝장내기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 당시 군대도 잘 안 간 미국의 뉴라이트들은 소련을 선제공격하자며, 케넌의 유약함을 비웃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만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케넌의 지혜는 결국 소련 붕괴로 증명되었다. 이들은 부시 시절 잠시 9·11테러로 부활했다가 이슬람 극단주의 버전의 조커인 빈라덴의 꾐에 빠져 미국을 한동안 치명적 히스테리의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비록 둘 다 한반도와는 좋지 못한 인연을 갖고 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탁월했던 루스벨트와 케넌의 보수주의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의 활력을 지켜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를 잃어버리면 보수 진영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파괴하고 아시아 공동체를 패권 경쟁에 밀어넣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대한민국은 결코 괴물로 변한 배트맨의 고담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공화국 운동과 천안함의 철저한 조사 및 엄정한 대응의 두 과정에서 한시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장 큰 하나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다. 국내적으로나 국제관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활력이 파괴되어가는 한국의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두 위대한 보수 거장과 함께 자유민주총연맹이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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