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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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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예전에 하던 마음공부 모임 사람들이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했다. 한 분이 내게 ‘선생님, 어찌 그리 강성입니까? 평소 조용하신 분이…’라고 묻는다. 내가 강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간혹 나를 좌파라고 부르는 이들을 만날 때 느끼는 생경함이다. 아마도 그동안 촛불시위를 비롯해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언급한 탓인 듯하다. 모임이 진행되면서 삶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어떻게 길거리에서 시끄러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겠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들과의 대화는 내게 싸움과 꾸짖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생태계를 파괴하며 진행되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교수모임에서 더욱 열심히 싸우자는 표현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끝자락에서 국민을 기만하고 생태를 파괴하는 현 정권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촛불시위 때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현 정권과 싸우는 것일까. 나는 현 정권에 비판적인 분들이 모두 정권과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싸움이란 비슷하거나 대등할 때 생긴다는 점에서 결코 싸운다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현 정권의 정책에 대한 질타는 싸움이 아니라 준열한 타이름이자 꾸짖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기의 실상을 바라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동체대비와 중생구제로 연결되고, 이는 기독교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종교는 주위의 소외되고 힘든 이들과 함께할 것을 강조하며 이러한 모습과 반대되는 상황에서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대처한다. 부처는 다투거나 진리를 왜곡하는 이들을 꾸짖었고, 예수도 바리새인들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을 꾸짖었다. 일반인들이 관념적으로 착각하듯이 세상의 삶과 무관하게 그저 무골호인으로 허허하는 것이 깨친 자들의 진리의 삶이 아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소외되고 힘든 이웃과 함께하기 위한 적극적 참여를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관념적 어휘가 아니라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헤아릴 것을 강조한다. 도덕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우위에 있는 꾸짖음을 접한 집단이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포장하기 위해서 일반인의 통념을 이용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쉽게 사용되는 수법이 상대방에게 이념적 딱지 붙이기다. 그나마 그것만이 올바른 상대방의 지적을 왜곡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둔 요즘 드러내 놓고 여러 사안으로 상투적인 북풍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촛불시위 두 돌을 앞두고 특정 언론사의 왜곡된 기획보도나, 이를 칭찬하며 반성을 촉구한 대통령과 더불어, 즉시 이에 뒤질세라 광란·사기·체제전복 등의 현란한 어휘로 치장하며 여당 의원들이 ‘맹비어천가’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모두 정부 나름의 노력이겠지만 이제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걱정이다. 꾸짖음은 싸움과 달리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있다. 바로잡아 너와 내가 함께 가기 위한 것이다. 현 정권처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무조건 광란과 체제전복자들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단순한 국론분열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상처를 남기는 행위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가야 하는 성숙한 사회를 생각할 때 최근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교육부의 폭거는 자신의 일부를 굳이 잘라내어 적으로 몰아가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감정으로 인한 소모적 갈등이 얼마나 우리 사회의 화합과 소통을 어렵게 하는지 잘 안다면, 의견이 다르더라도 혹은 외견상 싸움으로 보이더라도 우리 사회를 위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먼저 상대에 대한 애정이다. 또 상대방의 꾸짖음을 단지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로만 들어 증오와 분노의 마음으로 철저히 없애겠다는 미숙함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싸움과 꾸짖음의 차이를 생각하며 성숙한 사회를 위해 사회분열과 불안을 조성하는 이를 생각해 본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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