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04 19:15
수정 : 2010.06.0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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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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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반대하는 쪽은 프로라이프, 찬성하는 쪽은 프로초이스라 부른다. 우리말로 친생명, 친선택 정도쯤 된다. 둘 사이에 어떤 주장이 오갔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애완견 이름으로 양자택일하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친생명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을까? 생명과 친하겠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나. 그런데 선택과 친하겠다면 무슨 선택인지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명명에서 이미 프로라이프가 가산점을 안고 들어간다.
또 다른 언어게임을 해보자. 어느 후보가 ‘경제가 중요하다’는 구호를 선창했다고 치면, 경쟁자는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제는 모든 삶의 토대이니까. ‘성장이 중요하다’고 하면 약간은 반박의 틈새가 보인다. 분배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성장과 분배는 반대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하다’는 반박을 하려면 스스로 성장과 분배를 반대 개념으로 가정해야 된다. 그런데 분배는 분배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을 성장이 만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싸움은 성장의 승리로 돌아간다. 이게 무서워서 ‘분배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면 분배는 스스로 주변적임을 고백하는 꼴이 된다. 성장과 분배의 싸움은 이미 불공정한 게임이다.
보수주의는 ‘기업 편을 들겠다’를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 ‘성장이 중요하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낙태 금지’는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치적 쟁점을 피하면서 국가, 생명, 경제, 가족, 법과 같은 공유의 영역을 선점하고 자신들만의 것인 양 주인 행세를 한다. 그러면서 진보담론이 마치 이 공유의 영역을 부정하는 것처럼 객으로 만들어 버린다. 보수주의 정치담론의 전략은 공유가치의 선점을 통해 정당한 이의제기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천안함 사태를 보자. 침몰 직후 정부는 조사결과를 지켜보겠다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보수언론은 파편적인 사실을 근거로 북한의 행위로 몰아가는 추측보도로 일관했다. 매우 더딘 조사가 전개됐고, 그 사이 전사한 장병의 장례식이 국민들의 애도 속에 치러졌다. 이 애도는 꽃다운 젊음이 스러진 데 대한 무구한 슬픔의 표현이었을 테지만, 보수언론은 국가주의 영웅신화의 프레임으로 추모했다. 말없는 전사자들에게 자신들의 이념을 투사하고, 희생의 가치는 자신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장병들의 희생=국가=보수정권’이라는 현기증 나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졸지에 국가사랑을 입으로 부르짖는 병역미필자 다수의 보수지배집단이 숭고한 국가의 애국적 주인이 돼버린 것이다. 난감하지 않은가? 장병들의 희생과 국가안보라는 공유가치 뒤에 숨어버린 이 정치적 탐욕을 지적하려면 희생자 유족의 상처를 건드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거나 국가안보를 부정하는 ‘좌파’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니 말이다. 이렇게 전사 장병과 유족에 대한 군과 정부의 불편한 입장이 정리가 됐다. 그리고 지방선거에 때맞춰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강경한 대국민 담화도 이어졌다. 이번엔 전쟁기념관을 무대로 썼다. 민족의 집단적 상흔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보수의 역사로 또 날치기 독점한 게다. 이렇게 모든 정보와 해석과 공유가치를 독점했는데 조사결과에 어찌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절차상의 독점에 문제제기를 해도 ‘친북’이 되는데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보수는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이 공유가치의 등 뒤에 숨어서 상처받은 자의 공포와 불안을 동원해서 굴러간다. 탐욕이라는 목적어에 기만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고 폭력이라는 술어로 마침표를 찍는 것! 이게 한국 보수의 기본 문법이다. 북풍이라는 허풍으로 선거에서 시세차익을 노린 지금 당장의 얄팍한 정치적 저의보다 더 위험한 것은 보수의 문법 그 자체이다. 말의 진정성을 죽이고 공유가치를 훼손하면서 소통의 기저를 좀먹는 문법. 북풍 한파에도 꿈쩍 않고 역풍으로 맞선 이번 선거의 표심은 보수의 문법에 대한 도저한 시민적 거부의 시작이 아닐까?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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