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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11 21:36 수정 : 2010.06.11 22:35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해군 소속 천안함의 침몰참사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었던 때부터 6·2 지방선거 때까지 이어진 일련의 현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외국어 단어였다. 이 말을 아느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수업시간에 배워 기억난다는 이도 간간이 있었고, 처음 듣는 말인데 수첩에 적어두어야겠다는 지인도 있었다.

징고이즘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공격적 대외정책의 형태를 띠는 극단적 애국주의”라 풀이되어 있고, 아마 ‘호전적 국수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70년대 영국에서라고 한다. 노토(러시아-터키)전쟁 시기에 일부 영국인들이 “우리가 전쟁을 바라기야 할까만, ‘징고에 맹세코’, 싸울 거라면야 우린 배도 있고 병사도 있고 돈도 있지…” 하는 노래를 합창하며 러시아의 영토팽창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징고’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이 노래 가사의 호전성에 전율을 느낀 반전파 정치인이 징고이즘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 말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그 후 미국과 영국이 각기 치른 미서(미국-스페인)전쟁(1898)과 (2차)보어전쟁(1899∼1902) 때였다. 미국은 쿠바의 아바나항 앞바다에서 일어난 미 해군 소속 전함 메인호 폭발 침몰사건(1898년 2월15일)을 계기로 삼아 스페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메인호의 침몰 원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불분명하지만, 신문업자 허스트를 비롯한 미국의 호전론자들은 스페인군이 메인호를 외부에서 폭발시켰다고 선전하면서 반스페인 여론을 비등케 했고, 무력충돌을 내켜하지 않았던 매킨리 미국 대통령도 결국 전쟁을 선포해야 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둘러싸고 네덜란드계 식민자인 보어인들과 갈등을 빚었을 때 일부 영국인들의 징고이즘은 보어전쟁 개전을 촉진했다. 미국은 미서전쟁을 기점으로 국제 무력갈등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영국은 보어전쟁에서 악전고투하면서 국제적 비난을 자초했다.

보어전쟁에 종군하면서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를 쳤던 저널리스트 겸 경제학자 존 홉슨은 <징고이즘의 심리학>(1901)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터무니없는 소문, 격렬한 증오심 자극, 유혈적 선동 등이 도시의 밀집 주민들 사이에서 군중현상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징고이즘을 “전사(戰士)의 정열이 아니라 구경꾼, 교사자, 배후세력의 정열”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징고이즘 주창자에게는 “자신이 참전하려는 갈망보다 신경질적 상상력의 충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니, 자기는 참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쟁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징고이스트의 특징쯤 되겠다.

천안함 사건 원인 조사단의 발표는 근래 보기 드문 호전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6·2 지방선거 결과에서 보듯,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징고이즘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차분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조사단의 발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발표 내용을 믿더라도 당장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반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전쟁도 두렵지 않다고 외친 반면,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전쟁은 안 된다고 맞섰다는 점이다. ‘누가 전쟁을 독려하고 누가 실제로 참전하는가’에서 판단이 갈린 것이다.

6월은 6·25 발발 60돌이 되는 달이다. ‘전쟁을 잊지 말자’는 유혈의 영상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잊지 말자’는 다짐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윽박지름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각성을 일깨우기도 한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쟁하기보다 더 험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평화를 관리하고 평화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임을, 위정자들과 호전론자들은 알아야 한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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