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29 20:47
수정 : 2010.06.29 20:47
|
김별아 소설가
|
여름빛이 무르익어가면서 산책 시간을 앞당겼다. 그런데 열브스름한 여명 속에 걸음을 옮기노라니 발치에서 곰작거리는 것들이 눈에 띈다. 산로 위에 실금을 그으며 나아가는 지렁이, 무거운 집을 짊어지고 더듬이를 옴짝거리는 달팽이들이다. 헤아려보니 맑은 날에는 지렁이가 장사진을 이루고 비가 오거나 곧 쏟아질 듯한 날에는 달팽이가 떼로 몰려나온다. 시선을 10미터 전방에 두고 달걀 쥐듯 살짝 쥔 손을 흔들며 뒤꿈치-발바닥-발가락 순으로 땅을 디뎌 파워워킹을 하려다…그만 발걸음이 균형을 잃고 비치적거린다.
붉은 우레탄 산책로 위에 씹다 뱉은 껌처럼 들붙어 있는 지렁이와 달팽이의 무수한 사체를 차마 무시하고 지나기 어렵다. 무심코 한눈을 팔다가 실수로 밟기라도 할라치면 운동화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뭉클하고 파삭한 느낌이 다른 물건을 밟았을 때와 사뭇 다르다. “아야, 아파요!” “에구구, 나 죽네!” 같은 비명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지만, 한 생명이 끊길 때에는 종(種)을 넘어선 고통의 기운이 날카롭고 선명하게 느껴진다. 난 대단히 착한 사람도 아니고 신실한 생태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들보다 덩치가 크고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무참한 도륙을 행한 죄가, 아프다.
그래서 최소한 눈에 띄는 발밑의 것들만은 구제하기로 결심했다. 후딱후딱 보금자리 이동을 하지 못해 인간이라는 포악한 동물의 영역을 침범한(실제로는 인간이 그들의 삶터를 강점한 것일 테지만) 한없이 느리고 낮은 것들을 건너편 풀숲으로 옮겨주는 것이다. 성큼성큼 내딛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그것들을 주워 옮긴다. 그러면 조금은 착해지는 기분이 들고 거창하게는 죄업을 씻는다는 생각도 들지만, 솔직히 가끔은 귀찮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삭정이로 떠서 든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챌 때의 몸서리쳐지는 이물감, 엄지와 검지로 달팽이집을 조심스레 잡았다가 얇은 막이 팍삭 깨져버렸을 때의 허무함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업보의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게 편하겠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쏘삭인다. 내가 지렁이와 달팽이 몇 마리 옮긴다고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지구를 구할 것인가? 지렁이와 달팽이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어져 아이를 지각시켜도 좋은 것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막을 수 없고 구할 수 없고 언감생심 복 같은 건 받을 수 없다고 해도, 그 작고 약하고 낮은 것들을 향해 무릎을 꿇는 짧은 순간은 분주한 일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염결한 때이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가엾이 여기며 구제하고픈 마음은 설교와 염불이 필요 없는 절대적인 말씀의 정수이다. 나는 짓밟히는 지렁이에게서 부처님을, 정처없는 달팽이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수도자들이 생명을 파괴하는 죄악을 멈추라며 거리에서 삭발을 하고 눈물 흘릴 때 달팽이 예수님이 비로소 살아나신다. 몸에 불을 붙여 절박한 소원을 바칠 때 지렁이 부처님이 그 값진 공양을 기꺼이 받으신다.
지금까지 입이 써서 멀쩡한 강들을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짓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의 학교에서 학부모와 함께하는 수련회를 다녀오다 들른 남한강 강천보 공사현장을 목도하고 나니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진리로구나 싶다. 일단 가서 눈으로 보면 온몸이 반응한다. 그렇게 초록과 숨탄것들을 깔아 뭉겨 공구리를 치면서 좋아라 하는 족속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그리하여 사십 평생 종교와 별 상관없이 살아온 나도 간절히 내세와 지옥을 믿고 싶어졌다. 굴착기가 하루종일 골을 파고 덤프트럭이 밤마다 방 안에서 레이싱을 하며 흙먼지가 방향제처럼 코끝에서 맴돌고 카드뮴과 비소와 납으로 양념한 요리가 제공되는…(어쩌면 그들에겐 천국 같은) 지옥이 꼭 마련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지렁이와 달팽이에게라도 빌고 싶다.
김별아 소설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