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7.02 20:30
수정 : 2010.07.0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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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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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아들이 외고에 다닌다는 사실이 몇몇 언론에 보도됐다. 외고에 부정적인 인물이 자식은 외고에 보냈다는 거였다. 논조는 ‘위선의 프레임’이었다. 지도층의 부도덕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위선의 프레임’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지도층에 대한 부정적 기시감을 불러들여 상대에게 그대로 투사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레임에 갇히면 국가주의를 부르짖으며 병역을 피하는 고위층이나 멸사봉공을 외치며 뒷전에서 뇌물을 수수한 정치인의 부정적 이미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과연 아들이 외고에 다닌다는 사실이 곽노현 교육감을 이 프레임에 집어넣을 근거가 되는 것일까?
아들이 공부 잘해 외고에 갔다. 아버지는 외고에 부정적이다. 흥분해야 할 인물은 아들이다. 학력이 계급서열화 된 현실에서 명문대 진출의 전초기지인 외고를 갔는데, 아버지가 거기에 재를 뿌리니 말이다. 아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3자가 보는 그 아버지는 평소 아들의 성적으로 보아 외고 진학이 가능한데도 그 기득권을 접고 과열경쟁의 중심인 외고를 부정한 인물이다. 이 태도는 위선이 아니라 자기희생에 가깝다. 위선이 성립하려면 대중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선의 포즈’를 취해야 하고, 뒷전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현실적 이익을 챙겨야 한다. 국가에 대한 봉사를 외치면서 자식을 군대에 안 보내는 것이 군더더기 없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질문해보자. 외고에 부정적 견해를 밝히는 것이 ‘선의 포즈’인가? 대중적 공감을 얻어 그 자체로 행위자가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아니다. 외고폐지론은 소수 혹은 힘없는 다수의 의견일 뿐이다. 거기서 무슨 이익이 나오겠는가. 그렇다면 자식이 공부 잘해 외고 진학하는 것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것인가? 이 역시 아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의식화된 아들의 ‘자진사퇴’와 권위적인 아버지의 ‘육탄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걸 요구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최소한의 이성으로 분별 가능한 이 사안에 왜 보수언론은 본능적으로 ‘위선의 프레임’으로 대응했을까? 대중적 공감을 조건반사로 가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식 문제에 직면하면 자식 장래에 대한 노파심 때문에 사회적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 한국의 학부모였으니까. 이 정서적 급소를 찔러 자식 외고 보낸 데 대한 시기심을 불러내면, 이 눈먼 감정의 힘이 교육에 대한 정책적 소신을 ‘위선’으로 몰아가 주리라 기대했을 게다. 하지만 학부모가 변했다. 교육경쟁의 승리가 자식의 미래를 보장할 거란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 교육이 미래의 서열을 결정짓기 위한 도구로 내몰릴 때 모두가 삶의 패자가 됨을 깨닫고 있다. 진보 교육감의 대거 당선은 인간화된 교육과정의 향유에 대한 학부모의 의지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 누구든 학부모의 위치에 서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 갈망의 정체를 일상적 삶의 민주화로 본다. 교육에서 터져 나온 건 가장 고통이 심한 환부이기 때문일 뿐이다. 자식사랑이 유별난 한국 학부모의 자각이 교육환경의 인간화에서 그치진 않을 것이다. 자식이 평생 학교에서 사는 건 아니니까. 결국 자식의 행복은 그들이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회환경의 민주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자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부모세대의 삶의 문제를 자식세대에게 부채로 떠넘기지 않는 온전한 자식사랑의 방법이니까. 이번 선거에서 학부모는 분명하게 변화를 요구했지만 사회적 변화를 수렴해 나가야 할 정치적 대리인들은 더욱 강고해졌다. 못 보는 건가 안 보는 건가. 변화를 감지하는 센서가 남북 정상회담을 촉구하고 나선 보수교회 성직자들보다 둔감하니 말이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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