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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09 18:48 수정 : 2010.07.09 18:48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7월7일은 음력으로는 견우직녀가 울며불며 만난다는 날이다. 칠석날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양력 이날도 그 나름대로 중요한 만남의 의미를 담고 있다. 1988년 7월7일에 한국 정부가 발표한 7·7선언은 북한과의 관계를 비교적 전향적으로 바꾸는 민족정책과, 소련, 중국, 동유럽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7·7선언과 북방정책 이전 한국 사회는 냉전 분위기 아래서 북한은 물론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도 적대관계를 원칙으로 알았다. 일반인들은 이들 나라에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지적·문화적으로도 한국인들의 시야를 엄청나게 좁혀 놓았다. 냉전기 미국에서는 최대 적수인 러시아-소련에 대한 연구가 절정에 올랐던 데 반해, 한국에서는 병가의 상식인 ‘지피지기’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지적 완미함이 지배했다. 20세기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라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조차 그가 소련인이라는 이유로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연주할 수도 방송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7·7선언 이후 남북한간의 인도적 교류와 교역이 가능해졌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가져온 국제관계 변화에 힘입어 소련, 중국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가 가능해졌다. 용어에서나 정책내용에서나 북방정책은 서독 사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크게 참고했다고 할 수 있다. 동방정책이 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르라는 사민주의 정치인들이 추진한 것인 데 반해 북방정책은 군사정권의 연장인 6공 정부의 작품이었다. 6·29선언 후 민간의 통일운동이 고조되자 6공 정부가 이를 누르고 상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택한 것이 7·7선언이요 북방정책이었기는 하다. 하지만 북방정책은 결과적으로, 내정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6공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경색된 대외관계, 특히 이념적인 면에서 대립적인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는 보수세력의 주도권이 더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정책을 진보세력이 추구하는 경우에 비해 보수세력의 반발과 저항이 덜하고 따라서 사회의 이념적 소모도 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북방정책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구분하는 19∼20세기식 낡은 이분법적 지정학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알프레드 마한을 원류로 하는 해양세력론은 제국주의 일본의 해군 육성론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상업적-민주적 해양세력 대 농업적-비민주적 대륙세력’론 등과 결부되어 냉전논리를 강화하는 데도 복무했다.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한국은 대륙세력이 아니라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과(만) 연합해야 한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그러나 대륙세력과 단절된 한국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냉전시대에 충분히 경험했다. 당시 한국은 해양세력의 주체적 일원이 아니라 고립된 섬에 불과했다. 그나마 북방정책으로 한국은 대륙과의 연결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광대한 신(新)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지가 된다는 멋진 구상도 나왔다. 북한도 이에 동참한다는 전제가 물론 있기는 했지만.

북방정책 스물두해째를 맞은 지금, 한국의 대외정책은 오히려 후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남북한 관계가 남북기본합의서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불협화음이 드러나고 있다. 현 정부는 국제관계 및 문명교류라는 관점에서 6공 정권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그리 명예스럽지 못한 평가를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은 해양세력과 연결되면서 아울러 북방 대륙과도 이어질 때에만 고립된 섬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고, 4대 강국의 이해관계 대립 속에서도 스스로 독자적 행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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