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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03 19:27 수정 : 2010.08.03 19:27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편집장

“나는 죽어 없어질지라도 수많은 민꼬나잉들이 나타나 뒤를 이을 것이다.”

22년 전 이맘때인 1988년, 랭군 시민들은 한 말라깽이 젊은이의 연설을 들으며 고단한 민주 여정에 올랐다. 그해 3월부터 랭군공대 시위를 신호탄 삼아 전국 대학들로 민주화 불길이 번졌다. 버마학생회연합(ABFSU)을 조직한 랭군문리대학 학생운동가 뽀우우뚠(Paw Oo Tun)이 민꼬나잉(Min Ko Naing)이라는 이름을 달고 버마 현대사에 등장했다.

8월로 접어들면서 100만여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8일부터 군사정부가 무차별 총질을 해대며 시민 3000여명을 학살했다. 이어 군인들에 쫓긴 청년·학생 1만여명이 타이, 중국, 인디아 국경지역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민꼬나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두 떠나도 나는 내부(버마)에서 다시 태어난다”며 랭군에 남아 무너진 버마학생회연합을 재건했다. 지하조직을 움직이던 민꼬나잉은 1989년 3월 체포당해 3년 동안 불법감금 당한 뒤 군사법정에서 15년 형을 받고 악명 높은 인세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8888항쟁은 그렇게 끝났지만 시민들은 민꼬나잉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담았다.

그로부터 지난 22년 동안 버마 민주화투쟁은 길을 잃고 헤맸다. 유일한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은 아무런 정책도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그 흔한 대중시위 한번 조직하지 못한 채 아웅산 수찌만 외쳐댔다. 아웅산 수찌는 투쟁력도 협상력도 없는 자신의 비폭력평화주의가 우상만으론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했을 뿐이다.

그 사이 까친독립군(KIA)을 비롯한 국경 소수민족해방 세력들마저 군사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전선은 시들어갔다. 그 소수민족 해방구를 발판 삼았던 민주혁명세력들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 혁명조직인지 비정부기구(NGO)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헷갈리는 깃발만 날려 왔다. 그 국경에는 미국 국무부, 중앙정보국(CIA), 공화당 같은 수상한 국제사회의 돈줄이 흘러들었다. 민족해방·민주혁명 단체들은 돈 따먹기 경쟁에 온 정열을 불살랐다. 국경 쪽에서 버마 해법이랍시고 ‘이라크식 미군 개입’을 요구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던 2004년 11월, 민꼬나잉이 감옥살이 16년 끝에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다. 그이는 “버마 민주화를 도왔던 국제사회를 잊지 않겠다. 그러나 도움은 이미 충분했다”며 국제사회 타령만 해왔던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 모두에게 날카로운 경고장을 던졌다. 2005년 9월, 민꼬나잉은 88세대학생(88 Generation Students)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버마에 다시 한번 희망의 불꽃을 살려냈다. 아무도 나서지 못했던 정치범 석방운동을 벌이며 시민들에게 다가갔던 그이는 2006년 9월 다시 감옥에 갇혔다.

2007년 1월 풀려난 민꼬나잉은 군사정부의 실정으로 생필품 가격이 치솟자 동지 400여명을 이끌고 8월19일 마침내 랭군 도심으로 진출했다. 8888항쟁 뒤 19년 만에 터뜨린 그 기적 같은 시위는 9월 승복혁명을 끌어내며 민주투쟁사에 중대한 획을 그었다.

“몇 명만 있어도 투쟁은 가능하다”던 민꼬나잉의 믿음은 현실 속에서 증명되었다. 8월21일 다시 체포당한 그이가 65년 형을 받고 샨주 쨍뚱형무소에 갇히자 시민들은 ‘민꼬나잉은 버마현대사가 내린 선물’이라는 가장 고귀한 호칭을 붙여주었다.

8888항쟁 22주년이 다가오는 요즘, 군사정부가 올해 안에 단독 총선을 치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요즘, 그 총선 계획에 맞서 전략도 전술도 내놓지 못한 민족민주동맹이 눈꼴사나운 내부 권력투쟁까지 벌이며 적전자멸한 요즘, 그래서 민꼬나잉이 더욱 그리운 계절이다.

‘혁명의 동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일깨운 민꼬나잉, 우리가 아직도 버마를 저버릴 수 없는 까닭이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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