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06 20:42
수정 : 2010.08.0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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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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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5일 저녁, 드디어 베르벨 볼라이를 자택으로 방문해 만날 수 있었다. 이번 베를린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 그와의 면담이었던 만큼, 여러 번 이메일과 통화를 나눈 끝에 직접 대면하게 되었을 때 살짝 떨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베르벨 볼라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덧 낯선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를 전후한 무렵, 가녀린 듯한 외모의 40대 여성 볼라이는 동독 체제 전환의 한 상징이었고, 세계의 언론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었다. 그는 80년대 말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로부터는 ‘지하운동의 최고지도자’,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손꼽혔던 반면, 지지자들에게서는 ‘혁명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화가로서 안정된 삶을 살던 그는 80년대 초 ‘평화를 위한 여성’ 모임을 통해 평화운동에 투신하여 반체제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투옥과 감시가 거듭되는 중에도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내세우며 체제개혁과 민주화를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 최대의 전기는 88년 초에 찾아왔다. 그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서방으로 추방되었다. 대부분의 반체제운동가들이 추방당하면 서방에서 활동하게 되는 데 반해, 그는 재입국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국제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은 그가 공개적으로 재입국을 주장하자 호네커 정권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독 역사상 추방되었다가 동독 여권을 가지고 다시 귀국한 사람은 단 둘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볼라이였다. 그의 재입국은 박해를 받더라도 끝까지 동독 사회의 일원으로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독 정권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고, 정권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시민적 용기를 의미했다.
6개월 만에 귀국한 뒤 그는 89년 ‘노이에스 포룸’(새로운 포럼)을 결성하여 정권과 시민사회의 대화와 소통을 주장하고 나섰다. 비폭력 투쟁을 내건 이 단체는 동독 최대의 시민조직으로 성장했으며, 베를린장벽 붕괴를 전후한 시기에 이 단체의 뜻에 호응하는 시민들의 물결이 사회 전역을 뒤덮었다. 동베를린 페어베를리너 거리에 있는 그의 자택은 노이에스 포룸 결성 당시 사무국 구실을 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먼 나라에서 찾아간 연구자를 그는 불편한 몸인데도 정중하게 맞이하고 질문에 정성껏 답해 주었다. 그는 정치적 결정에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동독 사회의 개혁과 민주화에 매진하였으나, 통일 과정에서 서독의 주도로 모든 것이 결정됨으로써 동독 시민들의 발언권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데 대한 섭섭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하에서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으며 동독 사회가 그 나름대로 지켜왔던 가치까지 모두 묻혀 버리고 있는 데 대한 우려도 내비쳤다. 그럼에도 “후견 국가”였던 동독에서 시민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울였던 자신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은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서도 분명히 배어나왔다. 그에게 남북한 관계를 위해 도움말을 해주실 수 있는지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은 반드시 통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미움으로 갈라서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교류하고 만날 수 있을까, 그 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시간을 가지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귀국한 뒤, 그와의 면담 성사에 도움을 주었던 셸리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전화를 걸었다. 셸리케는 “당신과의 인터뷰가 마지막일 겁니다. 베르벨은 지금 병원에 있거든요” 하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보스니아에서 평화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가 작년 말 이후 대외활동을 중단한 것이 건강악화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에 한순간 목이 메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겨우, 조속한 건강회복을 빈다는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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