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27 20:31
수정 : 2010.08.27 20:31
|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광화문이 복원됐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때 경복궁 정문으로 건립됐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1865년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 이번에 경복궁 복원사업의 1단계 마무리 사업으로 대원군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 도심에 번듯한 왕궁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다. 왕궁은 웅장함 때문에 문화재 중에서도 관광자원으로는 최고다. 그런데 문화재는 역사교육의 자원이기도 하다. 문화재가 역사교육의 자원이 되려면 문화재 자체보다 거기서 추론되는 이야기, 즉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이야기가 거세된 문화재는 골동품일 뿐이다. 광화문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복원할 가치가 있는 역사교육의 자원일까? 후손들이 두고두고 곱씹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재일까?
1865년 대원군 때로 거슬러 가보자. 고종 2년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고, 재정이 부족해 당백전이라는 국채를 발행했다. 무리한 공사 때문에 민생은 피폐해졌고 왕조의 몰락만 가속화해 1894년에는 삼남의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일으키는 지경이 됐다. 경복궁 중건이 던져주는 역사의 교훈은 허세로 권위를 세우려 하면 백성이 죽어나가고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광화문을 복원해서 후세가 보면서 두고두고 새겨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게 아닐까?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65주년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는 사뭇 다른 시각을 보인다. 광화문 복원을 민족정기의 회복으로 본다. “100년 전 우리는 나라를 잃었습니다. 광화문이 가로막혔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막혔습니다.” “오늘 84년 만에 제자리에 제 모습으로 복원된 광화문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열어갈 문이 될 것입니다.” 광화문이 민족정기의 통로라면, 한국은 오히려 민족정기가 막혀 있던 시기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했다. 반면 광화문의 중건으로 막혔던 민족정기가 펑 뚫리던 시기인 고종 때의 조선은 주변 열강의 간식거리 정도였다.
왕궁의 정문을 옮기면 없어졌다 원위치하면 회복되는 것이 민족정기라면 도대체 어디에 쓰임새가 있을까. 만약 우리에게 민족정기가 있다면 숱한 외세의 침략에도 민족의 명맥을 유지해온 민초들의 고난과 저항의 과정에서 형성된 굳센 삶의 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과연 그러한 민족정기를 불러오기 위해 복원해야 할 문화재가 광화문인가? 일제강점기에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가 서린 문화재를 발굴할 생각은 왜 못하는가? 예컨대 조선인 원폭피해자와 정신대 할머니의 역사가 있는 기념관을 세울 생각은 왜 못하는가?
광화문 복원을 민족정기 회복과 연결짓는 발상은 대한민국 역사와 조선왕실사를 동일시하고, 사람의 이야기가 사라진 골동품을 물신숭배하고, 여기에 퇴행적인 민족주의를 투사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렵다. 쉽게 말해, 아파트 평수를 보고 삶의 질을 평가하듯이 화려하게 복원된 왕궁을 보고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다는 자부심을 가지자는 거다. 이렇게 습득된 ‘토건스러운’ 역사의식은 중국의 자금성을 보면 하루를 못 버틴다. 스펙터클한 문화재를 보고 생긴 역사의식은 타 민족과의 비교를 통해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경쟁심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의식은 내 삶이 타인과 연루돼 있고, 과거에 진 빚을 미래에 갚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건 왕조의 낡은 기왓장이 아니라 기왓장을 만들고 나른 사람들의 처지에 감정이입이 될 때 비롯된다. 생존 페르스의 <유적>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유적에는 희망이 없다” 왜 희망이 없을까? 유적은 빛바랜 권력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미래를 보라는 것은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자들의 각색된 이야기 일 뿐이다. 희망은 가늘게 삶을 이어온 민초들의 이야기 속에 있다. 문화재는 그걸 캐내는 도구여야 한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