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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31 18:32 수정 : 2010.08.31 18:32

김별아 소설가

나는 처음부터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아침에 깨면 기억 못 할 사람이랑은 말 안 섞어요!”라는 타박에도 속없이 헤벌쭉 웃어버렸다. 사랑은 시간이 흘러 식지 않으면 깊어지는 양자택일이라는데, 사람의 첫인상은 경과에 따라 터무니없거나 맞아떨어지는 둘 중 하나인가 보다. 겉으론 강하고 씩씩해 보이지만 마음속엔 눈물이 출렁거리고, 주변을 챙기느라 안달복달하면서도 정작 제 사정으론 절대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하는, 그녀가 꼭 나 같은 촌년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처연한 듯 웅숭깊은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짐작과 예감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용계리 죽전마을에서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부쳐 먹고살던 강석구씨와 허만순씨의 여섯 자식 중 막내, 대단히 예쁘거나 재바를 것 없는 평범한 아이 경순에게는 딱 하나 특별한 점이 있었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막걸리 한잔 걸친 아버지가 ‘목포의 눈물’을 흥얼거릴 때 지짐이 주워 먹던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고, 평소에 수줍음 많던 아이가 동네노래자랑대회에 나가서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불러 젖혔다. 노래를 부를 때만은 가난으로 인한 소외감과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사라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까지도 모두 잊었다. 그래서 그녀는 꿈을 꾸었다. 평생을 노래하며 살겠노라고. 그러면,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상을 졸업하고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상경한 그녀에게 세상은 톡톡히 쓴맛을 보여주었다. 새벽엔 신문배달을 하고 낮에는 경리일을 하고 그도 모자라 수강료 대신 강의실을 청소하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지만, 고만고만하게 닮은 목소리들을 흉내 내기보다는 자신만의 소리와 노래를 찾고자 했던 그녀는 자본의 시스템이 장악한 업계에서 물정 모르는 미운 오리새끼일 뿐이었다. 그러나 예쁜 척 잘난 척은 못하지만 스스로를 믿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촌년의 근성으로 그녀는 10년이란 세월을 앙버텼다. 그리고 끼와 낙천성을 물려준 아버지와 인생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인 어머니의 성을 따고 흔들리지 말고 달려나가자는 뜻의 이름을 붙여, 마침내 가수 강허달림이 되었다.

이따금 물색없이 대학의 강의에 불려나가면 세상만사 심드렁한 표정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갖가지 조기교육으로 교양을 완비하고 값비싼 사교육의 관리를 받으며 성장해 해외연수는 필수요 ‘스펙’을 쌓기에 일심전력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꿈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너무 일찍 서열화를 경험해 뼛속 깊이 패배감을 간직한 그들에게 야망 따윈 영어 격언에나 있는 것이다. 수강신청부터 학점까지 챙기는 ‘헬리콥터 부모’의 보호로도 높디높은 부의 세습의 벽은 넘을 수 없으니, 취업이 안 되면 언제까지 빌붙어야 할지 모르는 부모에게 함부로 저항할 수도 없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도 없다. 가끔 조심스럽게 꿈을 말해보지만 현실 앞에 그것이 꺾이는 건 당연하다고 믿는다. 젊은 친구들이 조로한 얼굴로 “꿈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라고 되물어올 때 여전히 철없는 나는 가슴이 아프다. 꿈은 망연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에까지도 행복을 느낄 만큼 절실하고 절박해져야 이루어진다. 아니, 쟁취된다.

그들에게 나와 닮은 바보인 강허달림의 노래가사를 빌려 말하고 싶다. “또다시 쓰러져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웃음 짓고/ 아무 일 없단 듯이 그렇게/ 그게 나인걸”(<독백> 중) 그렇게 꿈은 나를 깨닫고 찾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내 쓰린 상처와 실패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삶의 어느 순간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노래’를 꿈꾸며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목청을 돋울 때 비로소 구체적인 무엇이 된다.

다음주부터 장충동의 작은 극장에서 강허달림의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 한 병 옆에 차고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녀가 소리가 되고 소리가 그녀가 되어, 간절한 꿈이 마침내 무대 위에 눈부시게 펼쳐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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