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9.02 18:46
수정 : 2010.09.0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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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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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 중에는 인생을 잘 모르는 이가 많다. 나만 하더라도 집은 소유가 아니라 거주의 공간이라고 큰소리 치며 ‘투자’ 대열 합류를 거부하고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 최소한 5억 이상 손해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철없는 나보다 더 인생을 모르는 이들이 그 당시 미국이나 한국에서 옳은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고 믿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과 한국의 시민들은 어떤 야비한 수단을 써서라도 실행력이 있는 ‘나쁜 남자’를 원했다. 그래서 평소에 좋아하는 박성민 정치컨설턴트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책을 발간했을 때 무척 기뻤다. 이 책은 당시 무조건 진정성을 가지고 옳은 소리를 하면 대중들이 지지해줄 것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착각에 케이오 펀치를 날린 바 있다.
하지만 난 이제 시대의 결이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이후 최소한 2012년까지는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복수드라마로 이행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주인공은 도덕교과서처럼 착하고 무수히 당하면서도 바보처럼 웃는 남자이다. 사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착하고 약한 김탁구를 좋아한다고 전화면접원에게 말하고, 실제로는 강하고 잘나가는 구마준에게 한 표 꾹 누른다. 또 때로는 구마준 회사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정작 투표장의 장막 안에서는 그의 낙선의 쾌감을 기대하며 전율하기도 한다. 현 정부도 이 시대의 결을 조금은 눈치채기 시작했다. 친서민 노선과 코리안드림 총리 만들기 프로젝트는 바로 김탁구 신드롬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결에 대한 강한 불안감에서 나온다. 하지만 수십년 자의적 특권 지배의 상징인 구마준의 착한 남자 프로젝트가 드라마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것처럼 섬뜩한 사찰, 위장전입과 쪽방촌 투기 스토리들은 부단히 정부의 프로젝트를 스스로 파괴한다.
진보개혁진영에서도 조금씩 시대의 결에 조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착한 남자 문성근이 많은 정치전략가들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야권 단일 정당을 위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란 운동을 시작했다. 그제 만난 그는 비 오는 거리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더 홀쭉해졌지만 눈빛만은 김탁구처럼 더 빛났다. 난 이 운동(www.powertothepeople.kr)이 한국판 무브온(moveon)인 시민정치운동으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문제는 김탁구 신드롬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진보개혁진영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그저 더 진보적인 가치와 정책 어젠다를 경쟁적으로 선전하는 것에만 올인한다. 물론 진보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정당 운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운동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문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실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아니다. 단지 더 진보적인 가치를 내세우면 지지층이 결집한다? 그 가치에 진정성이 있는지를 어떻게 믿나? 혁신에 진정성이 있으면 우선 당부터 대중의 바다에 개방하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더구나 자칫 잘못하면 지나치게 진보화되어 중도의 공간이 열린 사이에 대중적인 개혁적 보수가 파고들 수도 있다. 오히려 더 진보적으로 선회해야 할 어젠다와 합리적 보수를 아우를 중도적 어젠다를 잘 준별하고 통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문제의 핵심이 마치 김탁구처럼 누가 자의적인 특권에 치열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대항하며 인간적 성숙과 매력으로 구마준 같은 정적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느냐이다. 진보적 어젠다는 이 커다란 문법 안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무상급식 운동이 성공한 것은 시민들이 좌파라서가 아니라 4대강 사업에 돈을 쏟아부으며 정작 저소득층 아이들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에는 무감각한 특권체제에 분노해서이다. 이제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치열하게, 그러나 유쾌하게 이기는 현실의 드라마를 공동으로 제작했으면 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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