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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01 20:27 수정 : 2010.10.01 20:27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10월3일은 개천절이자 동서독 통일 기념일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은 올해로 20돌을 맞는다. 지난여름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어느 저녁에 알렉산더광장에 한참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이라는 되블린의 소설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알렉산더광장은 과거 동독 시절 젊은이들의 애환이 숨쉬는 장소였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 11월4일에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최대규모의 동독 시민 집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날 내 목적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광장에 왔지만, 이 실수에 곧 감사하게 되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나의 눈을 잡아끈 것은 광장 저편의 어두워져 가는 대기 속에 무심한 듯 걸려 있는 글귀들이었다. “우리는 인민이다” “폭력은 사절” “서로 맞서지 말고 서로 함께” 등의 구절이 먼저 보이더니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라는 구호도 눈에 들어왔다. 동독 시민들이 시위와 집회에서 외친 구호들이다. 광장 저편에서는 20년 전의 평화혁명·평화통일을 기념하는 야외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독 시민들은 여행의 자유를 외치며 대대적 시위에 나섰었는데, 알렉산더광장에 모인 십만 군중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여기 머무른다”라는 구호가 나왔다. 이 구호야말로 장벽을 넘어 도망가겠다는 사람들의 물결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독 시민들은 “우리는 인민이다”를 외치며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어느 틈엔가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개혁운동이 통일을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전환되었다.

사실, 동독에서는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반정부 혹은 반체제 운동이 이어졌다. 1950년대 반정부 인사는 주로 공산주의자였는데 이들은 사형을 비롯해 혹독한 처벌을 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반체제 인사에 대한 처벌 형태가 바뀌었다. 사형이나 오랜 구금 대신 추방과 시민권 박탈이 주를 이루었다. 외적 가혹함은 줄어든 셈이다. 이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헬싱키협약 체결(1975), 체제비판적이던 브뤼제비츠 목사의 분신자살(1976) 등이 대표적이다.

헬싱키협약은 냉전 시기 유럽 국가들의 집단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서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국가들 사이에서도 진영을 넘어 인도적 협력, 인적 접촉, 정보교환을 강화한다는 이 협약의 조항이야말로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들뿐 아니라 동독·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도 인권과 관련하여 외부의 관찰과 어느 정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처우가 완화되었고, 동독 정부는 반체제 세력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간혹 보이기도 했다. 이는 동독에서 완만하게나마 시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요소였다. 동방정책으로 30년 동안 계속된 동서독의 교류가 또하나의 요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달리 북한은 외부의 관찰과 인권문제에 대한 개입을 허용하지 않아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최고 권력의 3대 세습 과정을 공식화했다고 한다. 북한이라는 국가를 김씨 일가의 가족재산으로 삼겠다는 것인지, 참 어이없다. 국제사회에서 존중받기 힘든 결정이다. 북한에서 자율적 시민사회의 형성은 지금까지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고, 현 상황대로라면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할 일이 끝나면 모르겠는데, 그것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별로 없다.

북한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최소한의 다자간 소통을 위한 합리적 틀을 만들고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 위에서 이를 바탕으로 관계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게 하는, 오래고도 힘든 과정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아시아판 헬싱키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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