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02 20:18
수정 : 2010.11.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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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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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다람쥐꼬리만큼 남은 가을이 아쉬워 약속 시간까지의 짬사이 산책길에 나섰다. 낙엽 쌓인 저수지 둘레길을 휘적휘적 걷노라니 문득 길섶에서 선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야, 저기 뱀이 가네! 유후!”
저만치 풀숲에 유혈목이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일명 꽃뱀이라는 별칭만큼이나 연둣빛과 주홍빛이 어우러진 늘씬한 몸통이 유혹적이다. 촘촘하게 연결된 가늘고 작은 뼈들을 구불구불 움직여 험한 길을 거침없이 기어간다. 그런데 그 멋진 몸짓을 넋 없이 바라보고 선 꼴을 보고 동행이 지청구를 한다.
“(사실은 ‘여자가’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나 눈치를 한 번 보고) 사람이 어째 그래? 뱀을 보고도 징그럽고 무섭다고 놀라지 않고 ‘유후’라니!”
듣고 보니 내 반응이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 겸연쩍긴 하다. 하지만 뱀을 보고 사람이 (혹은 여자가) 놀라야만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뱀이 나를 향해 독 오른 어금니를 드러내며 달려든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에게 적대감과 혐오감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시인 도종환 선생과 뱀 사이에 벌어졌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여름날 시골집에서 요양하던 선생 앞에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단다. 방 안까지 기어들어온 침입자를 보고 선생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니 사람이라는 낯선 동물과 마주친 뱀은 또 얼마나 놀랐을까 싶더란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자연을 대상화시키지 않는 우주적인 시선! 내가 무섭다면 뱀도 무서울 게다. 내가 징그러운 만큼 뱀도 나를 징그러워할지도 모른다.
기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일군으로, 치악산 전설에서 포악한 독물로 등장하는 뱀보다 더 무섭고 징그러운 게 사람이라는 족속이다. 가을 산행을 하다 보면 산언저리에 둘러쳐진 그물망을 발견할 수 있다. 산에서 물고기를 잡을 작정도 아닐 텐데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알고 보니 동면을 위해 이동하는 뱀의 길을 차단해 포획하는 불법 설치물이란다. 애꿎은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탐욕스런 정력제의 재료로 쓰이다 보니 뱀이 사라진 들판에 쥐들만 살판났다. 그런데 자연의 사슬은 섬세하고도 엄정한지라, 쥐똥의 바이러스가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 침투하면서 발열, 두통, 구토, 빈혈 등 위험한 증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행성 출혈열이 창궐하게 되었다. 아무튼 쥐새끼가 문제다. 그리고 그 쥐새끼를 설치게 한 것이 바로 사람이다. 이런데도 사람이 뱀보다 더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뱀과 마주친 일화를 통해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말한다. 그러려면 우선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오만을 떨쳐버려야 한다. 산꾼들이 새벽 산행을 할 때 발소리를 죽이는 것은 산의 주인인 뭇짐승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지난 토요일 청주에서 열린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문학제는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치러졌다. 사무에 데데한 문인들 사이에서 단연 탁월한 일꾼으로 꼽히는 도종환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을 그린 이홍원 화가와 은근과 끈기의 충청도 사나이 김희식 시인과, 생색 쓸 것 없는 뒷자리에서 손을 보탠 많은 충북 예술인들의 자존심이 담겨 있는 행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꼭 남을 위해 일하는 것만은 아닐 테다. 그들의 자아는 좁고 얕은 이기의 범위를 벗어나 타인을 향했기에, 그들은 결국 넓고 커진 자신을 위해 기꺼이 나선 것이다.
뱀의 길은 뱀이 알듯이, 사람의 길은 사람이…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다. 실로 뱀은 지혜롭고 자존심이 강한 동물이다. 온도의 차이로 먹잇감을 찾아내는 살무사는 0.003도의 차이까지 감지한다. 자기 먹이가 아니면 피자고 뭐고 함부로 침을 흘리지 않고, 같은 종족을 향해 독을 쓰며 덤벼들지도 않는다. 동물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그만큼이나 사람인 것이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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