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04 20:27
수정 : 2010.11.0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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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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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중간선거 참패 후 미국 민주당내 진보와 중도 진영이 심각한 위기감 속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 진보인사인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은 이제 애매한 중도의 외투를 벗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처럼 선명한 진보의 길로 가자고 채찍질한다. 반대로 중도 진영의 대표 주자인 에번 바이 상원의원은 이제 시민들 눈높이에서 제대로 된 중도로 가자고 속삭인다. 흔들리는 민주당을 지켜보며 본격적으로 오바마를 단임 대통령으로 주저앉힐 정치적 행보를 시작한 공화당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아직도 오바마를 잘 모른다. 지금 오바마는 그 어느 때보다 태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집권 초기 중간선거 대패의 부작용을 예상하면서도 놀랍게도 의료보험 개혁 추진이라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일자리에 무관심하고 진보 어젠다만 챙긴다는 참주선동의 먹잇감을 스스로 제공한 것이다. 이에 95%의 측근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평소에 유연한 오바마가 이례적으로 보이는 고집을 누구도 꺾지는 못했다.
역시 오바마는 큰 정치가였다. 그는 비록 자신의 정치생명은 위험해지지만 미국 경쟁력 부활의 전제가 천문학적 비용과 낭비로 망가진 의료보험 개혁임을 절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의 선구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리처드 닉슨이 모두 보수 대통령이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미국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반대투쟁에만 올인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타계 직전에 차라리 그때 닉슨과 타협했을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지금의 공화당은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 하지만 오바마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불운은 자신이 퇴조기의 진보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오바마 집권 초기 한 칼럼에서 이를 지적하며 그의 운명은 파운드화의 가치와 제국의 힘이 퇴조하는 시기에 의료보험 개혁을 완수하고 망가진 영국의 해럴드 윌슨 노동당 총리와 유사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역사를 진보 시대의 보수 대통령과 보수 시대의 진보 대통령으로 흥미롭게 분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초유의 새로운 분류법이 필요하다. 제국으로서 상승기와 퇴조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의 역사는 퇴조기 시대의 보수 대통령과 진보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자인 부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모한 전쟁과 견제와 균형 파괴로 퇴조기를 가속화시키며 다음 대통령에게 통치 불가능한 과제를 남겨주고 말았다. 이제 오바마는 본격적 퇴조기 시대 진보 대통령임을 더욱 선명히 자각하고 모든 노선과 방식을 이에 맞추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공화당 지도부가 그를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시키려고 하고 민주당 중도파가 불안해서 흔들어대더라도 장기적 시야 속에서 미국 퇴조기를 연착륙시킬 어젠다를 흔들림 없이, 그리고 전투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제 겨우 시작한 의료보험 개혁, 금융개혁, 제2차 경기부양, 노동자의 견제력 강화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파가 뭐라고 불평을 하더라도 현재의 불리한 역관계 속에서의 그 개혁은 제한적이고 점진주의적이어야 하며 백인 중도 노동자층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제 오바마의 ‘대담한 희망’에 대한 꿈을 접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는 대담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바마는 대담한 진보의 사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망가져버려 급진적 수술이 필요한 미국에서 상식적이고 김빠진 오바마의 어젠다조차 대담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진보파들이 생각한 대담함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앞으로 그의 ‘슬프지만 빛나는’ 도전을 기대해본다. 거대한 영광을 가져올 수 없는 퇴조기의 진보 대통령의 운명이란 점에서 그의 도전에는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슬픈 운명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한발 한발 단단하게 전진하며 미국을 연착륙시킨다면 그의 발자국은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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