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05 19:11
수정 : 2010.11.05 19:11
문용식 나우콤 사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트위터에서 벌인 설전을 목격하고 나서, 나는 참담해졌다. 나의 첫 직업이었던 일간신문 기자 생활, 그 시작인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에서 밤을 새우며 기자 선배들에게 무참하게 ‘깨지던’ 기억 때문이다.
정 부회장이 신세계 임직원 복지혜택 확대와 관련해 트위터에 글을 쓰자, 문 사장은 이를 인용하면서 “수퍼개점해서 구멍가게 울리는 짓이나 하지 말기를…그게 대기업이 할일이니?”라고 썼다.
수습기자가 이렇게 글을 써서 보냈다면? 신세계가 슈퍼를 몇 개나 개점했는지 질문을 받고는 대답하지 못해 눈물이 찔끔 나도록 혼난 뒤, 회사 쪽에 정확한 숫자를 문의해야 했을 것이다. 또 임직원 복지혜택 확대와 슈퍼 개점은 확실히 상충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한참을 추궁당한 뒤, 전문가에게 연락해 의견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반말?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 부회장은 문 사장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분 감옥까지 갔다오신분 아니니?”, “아무리 왼쪽에 서 계셔도 분노는 좀 줄이도록 하세요 사회가 멍듭니다”라고 썼다.
만일 정 부회장이 수습기자였다면? ‘감옥에 갔다 오신 분’을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차별적인 것은 아닌지에 대해 한동안 훈계를 듣고 지워야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이념과 ‘분노’와 같은 성격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근거가 있느냐는 추궁을 들었을 것이다. 원래 주제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인데, ‘감옥’이나 ‘분노’만 거론한 글에 대해 코웃음치는 소리도 들어야 했을 것이다. 틀린 띄어쓰기와 빠진 문장부호? 고성의 반말을 육성으로 들어야 했을 것이다.
두 분 다 뼈를 깎는 반성과 노력을 하셔야만 제대로 된 언론인으로 성장하실 수 있을 듯싶다.
트위터에서 벌어진 논쟁에 신문바닥의 수습기자 교육을 들이대 비교하는 이유는, 이제 모든 사람이 사실상 잠재적 기자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블로그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누구나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발언할 수 있다. 사회 의제 설정도 가능하다. 역사에 기록도 남길 수 있다. 문 사장과 정 부회장은 이미 언론인이다.
과거 이런 역할을 독점하던 게 신문이다.
신문은 재미있는 발명품이다. 특이한 비즈니스모델을 가지고 있다. 신문을 직접 사 보는 독자에게는 광고를 실어 정보라며 같이 팔고, 광고주에게는 독자에 대한 접근권을 제공하겠다며 광고 지면을 판다. 양쪽에서 돈을 버니 이른바 ‘레버리지’가 이루어져 저가 공세와 공격적 확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저널리즘’이라는 장치를 통해 비즈니스를 스스로 제어한다. 저널리즘은 콘텐츠 생산자가 스스로를 규율하는 원리다. 사실 확인, 균형 감각, 객관적 시선 등이 그 원칙의 핵심에 있다. 언론인들이 스스로의 직업을 규정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같이 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저널리즘’ 자체가 다시 한번 신문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 신문에 글을 쓰는 언론인은 객관적일 것이고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신문을 사 보고 신뢰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생산자의 자기규율 원칙인 저널리즘은 언론자유 운동과 한 쌍이다. 기자는 때로 정치권력과 통념과 종교의 선을 넘어서 진실을 추구하기도 하며, 그 권리를 스스로 지켜내곤 한다. 스스로를 엄격히 규율할 때, 더 강력한 힘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범죄자나 적군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일단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의 윤리와도 통한다. 거꾸로, 저널리즘을 잃어버린 언론인은 권리를 주장하기도 어려워진다.
신문이든 트위터든 뭐든 마찬가지다. 콘텐츠 생산자들 사이의 승부는 결국 저널리즘에서 나게 될 것이다. 문용식 사장이든 정용진 부회장이든, 신문기자든 파워블로거든, 그걸 잃어버리면 진다. 요즘 그 저널리즘이 부쩍 그립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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