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23 21:31
수정 : 2010.11.2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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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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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선수’였다. 나름으로 ‘예향’인 고향에서는 지역 축제가 열릴 때마다 백일장을 프로그램의 하나로 끼워 넣었고, 나는 일찍이 공책이나 사전 같은 상품에 혹하여 학교 대표 선수로 열심히 그에 참가했다. 그러다 보니 차차로 길속이 트여서 급기야 공모전에서 받은 상장으로 라면 상자를 가득 채울 정도의 화려한 입상 경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자랑인가 하면 꼭 자랑일 수만은 없다. 그 공모전이란 것의 절반 이상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투철한 ‘의식’을 함양하는 ‘반공’ 글짓기였고, 나머지도 세금을 잘 내고 전기와 물을 아껴 쓰고 공공질서를 잘 지키자는 구호를 앞세운 ‘관제’ 글짓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어, 훗날 글은 재주를 피워 짓기보다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뼈아픈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줄곧 그 요령부득한 요사를 피웠더랬다.
하여 왕년의 ‘선수’이자 이즈음 심사위원으로 처지가 바뀐 경험을 더해 에세이 공모전에서 입선할 수 있는 비결을 공개적으로 털어놔볼까 한다. 생뚱맞은 기밀 누설일지도 모르겠으나 한편에 <한겨레> 신문이 **일보나 ##일보보다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음을 고려해볼 때, 대학생만큼이나 ‘스펙’을 쌓는 일이 긴요해진 중고생과 학부모에게 ‘급하게 찬 맥주를 먹고 싶으면 얼음을 넣어 마시라’ 정도의 알뜰한 정보는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선 공모전에 출품하는 작품을 쓸 때는 ‘첫 문장’이 중요하다. 심사위원들과의 첫 대면에서 인상적이고 강렬하며 전체의 내용을 통괄할 수 있는 문장을 선보여야 한다. 첫 문장이 아니면 첫 문단, 어쨌든 첫머리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그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형식적인 특이성으로, 남들이 쓰는 틀에 박힌 방식과 다르게 표현하고 구성해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수백 편에 이르는 응모작을 심사하는 일은 피곤하고 지루하다. 따라서 초반에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던 심사위원들이 피로감과 마감시간에 쫓겨 인간적 한계를 드러내기 전에 가능한 한 빠른 접수번호를 받을 수 있도록 부지런을 떠는 세심함도 필요하다.
그런데 전문적인 문학상 공모를 제외한,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한 에세이 공모전에서 형식보다 긴요한 입선 비결은 따로 있다. 작금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국가인권위원회 주최 ‘인권 에세이 공모전’을 예로 들어 보겠다. 예심에서 가장 먼저 걸러지는 작품은 ‘인권이란’ 혹은 ‘인권의 정의는’ 따위로 시작되는 글이다. 인권을 주제로 공모한 글에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는 사전적 정의는 동어반복에 사족일 뿐이다. 그건 낮말을 얻어들은 새나 밤말을 주워들은 쥐새끼도 나불댈 수 있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권이 과연 내 삶과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떻게 실현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장애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해 말할 때에도 그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대상화시킨 글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나의 문제를 깨닫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작더라도 직접 겪고 느낀 것,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외부로 확장되는 ‘인권 감수성’이 절실하다. 즉 ‘용례는 내 눈길이 닿는 곳, 반경 50미터 안에서 찾으라’는 것이 에세이 공모전 입선 비결의 핵심이다.
선수의 눈에는 선수가 보인다. 경험하지도 않고 경험한 척, 생각조차 없는 주제에 대단히 고심한 척하는 꼼수에는 넘어갈 리 없다. ‘잘’ 쓴 글보다는 ‘좋은’ 글이 오랜 감동으로 남듯 진정성은 허울 좋은 형식으로 눈속임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해 인권 에세이 공모전 심사위원장으로 함께 좋은 글을 뽑기 위해 고민했던 유남영 상임위원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직 운영 방식에 항의하며 전격 사퇴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그런데 어쩌랴, 초딩과 중고딩들도 일러주면 닁큼 알아먹는 진실의 비결을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는 터이니!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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