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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26 21:13 수정 : 2010.11.26 21:13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올해는 러시아 문학사의 두 거인과 관련된 기념의 해다.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150년 전에 태어났고 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10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속의 체호프는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그의 탄생 150돌을 기념하는 연극 공연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먼 남쪽에 있는 체호프의 향리를 방문하여 그의 예술에 경의를 표하였다.

반면,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은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다. 백작 칭호를 가진 대귀족이요, 향리 야스나야 폴랴나에 영지를 가진 부호이자 세계적 명성을 가진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여든두 살이던 1910년, 가족과 재산, 편안한 삶을 모두 버리고 빈자의 삶을 살기 위해 차가운 가을 새벽 여행길에 올랐다.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딸 하나를 데리고 작전을 치르듯 비밀리에 시작된 그의 여행은 얼마 안 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남쪽으로 가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노구의 문호는 급성 폐렴에 걸렸고, 결국 11월20일(구 러시아력으로는 11월7일) 아스타포보라는 조그만 시골의 기차역장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국의 소설가 김별아씨가 그의 산문집에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라는 제목을 붙였을 만큼, 이 문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붙들고 고투하는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남겨준 길잡이가 되었고 특히 그의 죽음이 안겨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어느 인터넷 논객이 명명한 바로는 세계 문학 최초의 ‘팝스타’였다. 그의 마지막 여행과 죽음 자체도 당시 영향력을 강화시켜 가고 있던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극적 성격이 더 부각되었다.

그러한 톨스토이니만큼 세계적으로 성대한 기념사업과 축제가 벌어지리라 예상했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톨스토이 전집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었고 영국의 영화계는 대배우들을 기용하여 톨스토이의 최후를 다룬 <마지막 정거장>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개봉했다. 그러나 문학사, 사상사 속의 그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의 삶과 학문, 사상을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행사나 공연, 기념사업들이 열리지 않은 것은 불균형스러워 보인다.

특히 그의 모국 러시아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문인, 예술가들을 기념하는 사업에서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러시아인 만큼, 이 고요함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1937년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사망 100주년 때는 기념행사가 소련 전역을 뒤덮었고, 푸시킨은 이때를 기해 러시아의 국민시인으로 등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공식적 언급이 없으니 비교가 된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것이 현재 힘을 가진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사회 불평등과 민중 예속, 제국주의와 전쟁을 극복하고자 진력했고, 당시 제도권 교회가 드러내고 있던 반민중성과 위선을 비판하다 결국 파문을 당한 ‘비타협주의자’였다. 그는 투철한 평화주의자, 반제국주의자이면서 비폭력주의자였으니, 어떤 빌미로건 대외 강경책을 쓰거나 무력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편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핍박받던 분리파 종교공동체를 위해 소설 <부활>의 인세를 모두 기부했을 정도로 소수자, 약자를 위해 전력을 기울인 그였으니, 약자를 억압하며 권력과 부 위에서 욕망담론을 방패 삼아 편안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강요하는 근본적 자기성찰과 삶에 대한 반성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것이리라.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의 문학 작품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의 사상에도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전면적 재조명은 피한다면, 그것은 현대인들이 위선과 욕망, 폭력의 굴레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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