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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17 20:50 수정 : 2010.12.17 20:53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진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잔 얘긴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사랑이 충돌해서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 보자. 지제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거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에는 15억원을 기부했다.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임금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한다. 진정한 이웃의 고통은 부인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의 특권적 형식으로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란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무력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진정한 이웃의 요구에 정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무력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일상을 가린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에 대해 세계 일류기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외면을 보라. 북한의 포사격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사이 이웃의 권리를 분배하는 예산안을 당파의 권리로 날치기 통과시킨 집권세력은 또 어떠한가. 이해관계로 뭉친 패거리만 이웃으로 경계 짓고 진정한 이웃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이웃사랑’인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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