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04 20:36
수정 : 2011.01.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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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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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에 북한산 케이블카 건설 반대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니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아들 친구 인걸이 아빠(<바로 보는 우리 역사>의 저자 박준성씨)의 제안은 주최측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예수님 생일날에도 잔치는커녕 러시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몽골의 울란바토르, 그리고 통증 치료에 쓰인다는 극저온 냉동사우나의 예비냉동실에 맞먹는 체감온도 영하 30도의 산중을 헤매며 겨울산이 어떤 곳인가를 톡톡히 경험한 터라 산행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월2일에는 떡만둣국 한 솥이 빌 때까지 다른 요리를 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입이 닷 발 나온 아이를 데리고 동네에 새로 개업한 ‘장모님 빈대떡’을 찾았다가 휴무일이라는 표지 앞에 돌아서 왔다. 얼마 있으면 2주기가 되는 용산참사로 남편 이성수씨를 잃은 권명숙씨가 차렸다는 가게가 마침 집에서 걸어 십 분이니 ‘이념적 소비’는 아니더라도 빈대떡에 막걸리 한 사발 정도의 마음은 부조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새해의 첫날, 둘쨋날을 연이어 허탕치고 나니 문제는 새해 첫 칼럼으로 쓸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를 어루더듬는 <뉴욕 타임스>의 신년 사설만큼 멋들어지진 못하더라도 뭔가 삶을 견뎌야 할 이유와 희망을 말하고 싶은데, 고작 사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새해의 꼴이 가관이다.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로 선정된 언론들이 잿밥에 눈이 멀어 염불에는 입 닥치고 있는 사이 소비자물가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치솟아 월급과 자식 성적 말고는 모든 것이 다 올랐다는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아프거나 아픈 놈과 함께 있던 놈들을 모조리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도 저주 같은 전염병은 나날이 번져 가니, 그 가엾은 동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는 축생계에 들어 인간이라는 모진 귀물을 만나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정치라는 것이 아예 실종되다시피 한 이 난국에도 위정자라는 자들의 자화자찬, 아전인수, 적반하장의 소리가 드높으니 그것은 필시 국민들에게 미치기 싫으면 웃기라도 하라는 뜻이렷다!
본래 나는 타종식에 참가하거나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거나 카운트다운을 하며 새해를 맞는 유형이 아니다. 새해라고 이등변삼각형이나 마름모꼴의 해가 뜨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해와 달이 바뀌고 날과 요일이 변하는 건 인간의 자의적 분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흐른다. 무한한 시공간을 그저 잠시잠깐 스쳐 지나간다. 그럼에도 추운 바닷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떠오르는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소박한 사람들을 보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찌그러져 바싹 오그라붙은 희망이나마 그러잡고 새 목표를 세워 새롭게 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연초 계획이 모두 무산된 김에 아이를 끌고 도서관에 갔다. 나의 묵은해는 1616년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죽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 끝났고, 새해는 1771년 5월4일 편지로 첫 장을 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대하소설을 읽고 겨울에는 고전을 보며 더위와 추위를 견디는 것이 가난하고도 호화로운 작가의 피서·피한법이다. 그렇게 서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올해가 신묘년이라는 것이 생각나고 소심한 도시인들처럼 시계를 보며 헐레벌떡 달리는 흰 토끼가 떠올라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펼쳤다. 그리고 수많은 상징과 비유로 가득 찬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를 찾았다.
앨리스가 묻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겠니?” 고양이가 답한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가에 달려 있지.” “난 어디로 가든 상관없는데….” “그럼 어디로 가든 상관없잖아!” 나와 앨리스, 그리고 2011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또다시 벅찬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싶은가?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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