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1 20:30
수정 : 2011.01.2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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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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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정세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으로 얼어붙더니 급기야 한-일 군사협력론까지 제기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제안을 강력히 밀어붙이는 것 같다.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에 자위대를 파견할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국민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고 일단은 다소나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모양이다. 이러한 보도가 나왔는데도, 구제역과 한파 속에서 모두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인지 한국 내 반응은 그리 강경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한-일 군사협력론을 발전시켜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수정제안론이 나오기도 했다. 답답한 일이다.
제국주의 시기 이래,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된 적이 언제 있었을까만, 유독 몇 해 전부터인가 현재 상황을 구한말에 빗대는 논의들이 많아졌다. 요동치는 국제관계 속에서 좌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논의하다 보니 치미는 우국충정일 것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한국민의 교육 수준, 정치의식을 생각할 때 다소 과장된 비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일 군사동맹론은 분명 구한말을 생각나게 하는 제안이다. 조선·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이던 상황에서 1896년 일본 정치인 야마가타는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와 비밀회담을 했다. 그리고 38도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여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남북을 나누어 가지자고 제안하였다. 이 안은 그 자체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의 원형이 되었다. 다만 일본은 한반도 분할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고 한반도 전쟁을 자국 경제부흥의 계기로 삼았을 뿐이다.
이제 한국이 한-미 동맹에 더하여 일본과 군사협력관계에 들어설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이 더욱 심하게 중국의 영향 아래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은 각기 일본·미국 연합세력과 (제정러시아를 대신한) 중국에 의한 세력 분할의 장이 될 것이다. 경제력이 약화되고 있는 미국이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지지할 것이고 중국 역시 이에 맞서 군사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이해 대립을 생각하면 이는 불 보듯 훤한 일이다.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도 위기시에 상호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 또한 상하이협력기구 수립 이후 군사적으로 가까워져 있다.
남북한의 관계 악화야말로 한-일 군사협력론을 불러온 원인이다. 한-일 군사협력론이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의 민족감정이 아니라 이 지역의 군사주의와 신냉전적 대립 강화이다.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충돌이 초래된다면 남북은 서로 탓할 사이도 없이 모두 패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열강은 열심히 주판알을 두드릴 것이다. 지난해 12월2일 저녁, 연평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 김치복씨와 배복철씨의 빈소가 차려진 인천 길병원에 문상을 갔었다.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평화가 교란된 뒤 열흘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빈소는 지친 유족들만 자리를 지킬 뿐 조문객이 없어 그야말로 썰렁했다. 용감히 전쟁불사를 외치던 사람들은 거기 없었다. 군사주의자들은 정작 군사적 충돌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지 않는다.
대안은 한-미-일 군사동맹과 북-중-러 군사협력의 대립 구도 속에서 군사적 긴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포괄적 평화와 포괄적 안보기구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 초석이자 핵심은 남북한 간의 관계 정상화이다. 마침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오래간만에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는 소식이다. 남북관계 회복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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