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4 18:08
수정 : 2011.01.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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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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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과 한파가 계속되는 엄동설한이다. 유년 시절 눈 덮인 고향을 떠올리며 우리가 품었던 삶의 이상을 돌아보기도 하고, 얼어터진 수도관과 출퇴근길의 혼잡 때문에 삶의 핍진한 현실을 퍼뜩 깨닫기도 하는 때이다. 삶은 늘 이렇듯 이상과 현실이 곡예처럼 맞물려 엮어져 있지 않나 싶다.
혹한 속에 맞은 몇몇 죽음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더 깊고 더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역사를 앞서 달리며 바람을 맞아야 했던, 그리하여 후발주자들을 편안하게 해줬던 그 ‘선두주자들의 벌금’을 또한 떠올려본다.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우리네 삶들이 해당되는, 늘 결단하지 못했던 후발주자로서의 미안함도 생각해보게 된다. 꼴찌였지만 누구 못지않게 받고 싶었던 갈채도 그리워해 본다.
사법살인 52년 만에 이루어진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을 통한 무죄선고는 인간과 생명에 반하는 정치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무죄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사법이 죽인 조봉암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그가 선구자의 벌금으로써 치러야 했던, 소중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앞서 걸어갔던 ‘한반도 복지’, ‘평화통일’, ‘민주주의’, ‘인간평등’의 선진 사상은 누가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 탈냉전의 지금에 들어도 그의 사상, 용어, 개념, 현실인식은 놀랄 만치 선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법은 왜 52년 전에는 진실의 편에 서지 않았던가? 광풍의 시대에 조봉암 못지않은 억울한 사연을 안은 채 국가·권력·법률·이데올로기·정부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의 무죄는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후세 가족마저 옥죄었던 이 억울한 삶들의 묘비명은 누가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참으로 곡진한 개인적 삶을 살았으되, ‘자상하며 정의롭고’ ‘따뜻하며 올곧은’ 모성성으로 우리를 ‘품어주며 깨우쳤던’ 박완서 선생의 죽음은 전쟁과 가난의 시대가 낳은 정신적 풍요의 세대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곡진했던 만큼 진실했고, 슬펐던 만큼 진정성이 넘쳤던 선생의 소설은 과장도 허구도 없는 자기 삶의 정신적 문학적 연장이었다. 구체가 도달한 영성은 그가 보여준 놀라운 깨달음의 수준을 가늠하게 했다. 자기 삶의 진액을 빼내어 썼음이 분명한, 너무도 슬퍼 책읽기를 중단한 채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장면들이 그의 소설들 속에는 너무도 많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젠체하며 크고 굵게 쓰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길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선생은 전범적으로 보여줬다.
저 풍진 광풍의 세상을 만나 자신들의 개인적 고난을 극복한 영혼의 자양분으로 우리의 정신을 먹여살렸던 그 세대들의 사라짐, 이제 누가 또 박완서처럼 “따뜻하면서도 올곧을 것이며”, “품어주면서도 깨우칠 수 있을 것인가?” 이 겨울 리영희, 이돈명, 박완서의 죽음은 격조와 희생, 지혜와 위로, 계몽과 헌신의 결합을 삶으로 보여주었던 현자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고 있음을 뜻하는 듯하여 몸보다도 더욱 추워지는 우리네 영혼이 아닌가 싶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추운 새벽에 리영희 선생의 영결식장에서 만난 한 평범한 시민은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했다. 그는, “아빠는 비록 리영희 선생처럼 온몸과 영혼을 바쳐 남을 위해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과 정신만은 존경했다고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며, 바쁜 출근길에 영결식장을 잠시 들러 아이에게 보여줄 영결식 팸플릿을 하나 달라고 했다. 정치인이나 언론인이나 학자나 종교인들이 목소리 높여 정의를, 민주주의를, 평화를, 복지를, 평안을 외치고 있음에도 거꾸로 가고 있는 현실에서 “팸플릿 하나 달라”며 어두운 새벽에 그가 내민 손길은 평범성이 갖는 위대성을 깨닫게 하고도 남았다.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는 위대한 깨우침처럼.
꽁꽁 얼어붙은 혹한의 이 아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타인의 삶과 영혼을 위한 선두주자의 벌금을 치를 수 있을까 조용히 생각해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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