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5 20:13
수정 : 2011.01.2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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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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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드셔 보실래요?”
나와 J씨와의 인연은 그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솜씨도 없는 주제에 손만 커서 밑반찬 만들려다 잔치음식 하는 지경인지라 나눠 먹을 이가 절실하던 차였다. 그때 우연히 만난 이웃의 J씨는 여러모로 나와 찰떡궁합이었다. 빈 접시를 돌려줄 수 없어 몇 차례고 별식을 만들어 주고받다 보니 우리가 공통적으로 남에게 신세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며 취미와 취향까지도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장이란 곳을 하루 만에 때려치우고 혼자 틀어박혀 글을 쓰던 내게 J씨는 사회에서 처음 사귄 친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J씨의 집에 초대받아 차를 마시던 날,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몇 학번이세요?” 나이를 묻고자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순간 J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갔다.
“전…… 대학에 다니지 않았어요.”
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내 입장에서 상대를 넘겨짚은 오만에서 비롯된 무례였다. 거듭 사과를 했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물론 그 후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다시는 누군가에게 ‘학번’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가리키는 ‘386세대’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껄끄러웠다. 경계와 절연을 강조하는 세대론에 찬동할 수 없을뿐더러 학생운동으로 민주화를 이끈 공을 인정한다 해도 10명 중 3명만이 대학생이던 시대에 ‘학번’이 세대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로 386세대는 앞 세대에 맞서 일종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강조된 바가 없지 않기에, 도종환 선생의 시구처럼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들에 의해 알리바이이거나 후일담이거나 금배지를 선사하는 논공행상의 자료가 되어버렸다.
작금엔 386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착잡하다. 이른바 변혁을 꿈꾼 이들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만든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라는 사실과, 젊은 세대에게 존경받는 선배는커녕 교활하고 완강한 기득권층이라고 비판받는 현실이 부끄럽다. 하지만 강강한 현장 활동가로부터 학살자에게 세배하는 정치꾼까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생각하면 이제 386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는 듯하다. 그런데 386의 기준이 나이나 학번이 아니라 어리석지만 아름다웠던 청춘의 정신이라면?
대부분의 386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현실과 꿈의 괴리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렇다면 67년생 86학번으로 학창시절 학생회 활동을 했고 지금은 우림건설의 문화홍보부장으로 일하는 이상엽씨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연말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후원콘서트에서 만난 그는 선한 웃음이 인상적인 전형적인 직장인이었다. 워크아웃 중인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해 땀 흘리는 한편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산파 구실을 했던 ‘존경하는’ 아내를 외조하고 짬짬이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듯했다. 장애, 여성, 인권 등 그가 정기 후원하는 시민단체만도 10여개에 이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대목은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 같은 개념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10여년 전 회사에 ‘사회공헌팀’ 설치를 제안해 책 나눔, 엔지오(NGO) 활동가를 위한 장학사업, 문화공연 등 수많은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는 삶과 꿈이 만나 충돌하지 않는 좁은 길을 기어이 찾아냈다. 건강한 시민인 이상엽씨의 명함 뒷면에는 ‘세상의 중심, 사람/ 사람의 중심, 사랑’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새로운 깃발이자 구호는 사람과 사랑이었다.
“아직 나는 꿈꾸고 있다. 인간 세상 평화 통일 그리고 만인의 자유를. 이 땅의 소시민으로 무명의 386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매일 난 꿈꾸고 있다.”
안치환의 새 노래 <그래 나는 386이다>를 가만히 따라 불러본다. 여전히 꿈꾸고 그 꿈을 부정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10년에 다시 10년을 더해도 그래, 우리는 386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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