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2.15 19:10
수정 : 2011.02.15 19:10
|
김별아
|
김별아 소설가
한국작가회의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은 산행 도중 임도와 면한 고개에서 점심거리인 컵라면을 막 받아들었을 때였다.
‘소설가 박완서 회원께서 영면하셨습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이 흔들려 출렁댔다. 컵라면을 내려놓고 믿기지 않는 그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다. 선생이 가셨다. 헐벗은 산자락을 망연히 바라보는 사이 라면이 다 익었다. 선생이 떠나셨다. 그럼에도 갈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은 높고 여기서 열량을 보충하지 않으면 남은 산행이 버거울 것이었다. 자동인형처럼 뚜껑을 열고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난 그날에도 누군가는 살겠노라고 이렇게 불어터진 면발을 빨고 있을 테다.
재바른 지인들이 전날 조문을 다녀왔다기에 폭설이 내리는 길을 홀로 나섰다. 영정 속의 선생은 생전처럼 조쌀하고 숫접은 모습으로 웃고 계셨다.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부의금을 받지 말고 대접하라는 유지를 기억해 선생께 마지막으로 얻어먹는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문득 지금껏 한 번도 문인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분루를 삼키지 않는 한 좀처럼 울지 않는 건 냉심한 성정 탓인지 모르겠지만, 같은 운명에 매였던 이들과의 이별은 단순히 슬픔이나 아쉬움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별꽃같이 노란 국화에 묻힌 이윤기 선생을 뵈었을 때도, 천연스레 웃고 있는 임동헌 선배의 영정 앞에 섰을 때도, 박경리 선생이나 이청준 선생같이 사적인 기억은 없지만 외따로 흠모하던 분들의 부고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김남주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에서 만취해 공연한 멱살잡이를 하며 설움을 한풀이하는 문인들이 왕왕 있었건만 작금의 조문객들은 얌전하고 유순하다. 다만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야릇한 상실감을 가눌 길 없어 시시풍덩한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며 허허롭게 웃는다.
글쟁이의 삶은 고단하다. 운이 좋아 살아생전에 재능과 노고를 인정받은 이나 불운하여 보상도 받지 못한 이나, ‘필승’을 외치며 폭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는 문학을, 예술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가난하다. ‘재수 없으면 100살’이라는 저주 어린 축복의 말이 유행하는 고령화 사회에서도 소설가들의 평균수명은 64살, 시인들은 한술 더 떠서 62살이란다. 기진맥진한 듯 부랴부랴 떠나는 돌연한 영이별도 서럽지만, 부음이 들린 바로 그날 대형서점에서 설치한 ‘박완서 특별전’ 매대에서 평소보다 몇 배의 책이 팔렸느니 어쨌느니 하는 뉴스는 기막히다 못해 역겹다. 왜 작가가 살아 있을 때는 읽지 않던 책이 죽었다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가? 박완서 선생이 그 천박하디천박한 생난리를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래서 장르는 다르지만 궁핍과 소외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사망 소식은 슬프기보다 아프다. 문화예술은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이기에 앞서 그 자체로 값지고 귀한 사회적 자산이다. 100만부를 파는 한 명의 작가보다 1만부를 파는 100명의 작가가 더 필요한 것은 작가의 수만큼 다양한 세계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숱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로서의 운명을 사랑한다. 하나둘 떠나는 선생들을 눈물보다는 미소로 배웅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고통만큼 행복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임동헌 선배가 이청준 선생의 장례식에 다녀와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선생님이 어디로 떠난 것인지 알고 싶다”였다. 나는 선생들이 영영 떠나시지는 않은 것 같다. 바람 좋고 햇볕 고운 산골짝 어느 마을에 감쪽같이 숨어 모여계실 것만 같다. 박완서 선생은 꽃을 가꾸시고 이윤기 선생은 술을 자시고 임동헌 선배는 그 모습들을 사진에 담고…… 그곳에서까지 소설쓰기같이 험한 일은 하지 않으시길 비는 한편, 언젠가 나도 졸작 한 편 품에 안고 그 마을의 말석에 숨어들길 바란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선생님, 부디 편히 쉬시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