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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7 20:29 수정 : 2011.03.17 20:29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비행기가 지나가면 섬뜩하게도 그 끝에 빌딩이 보인다. 과거 9·11 테러 현장에 있었던 트라우마다. 도대체 상상하기조차 힘든 지금 일본의 대재난은 나의 오래된 심리적 상흔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당시 영화 시나리오로서도 너무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평가될 만한 9·11 테러 사태 후 부시 정부는 예방적 상상력 결핍으로 인한 실패라고 규정한 바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부시 정권은 어처구니없게도 농약이나 뿌리는 경비행기를 놓고 본토를 폭격하는 대재앙의 전조라며 예방적 군사 독트린 상상력으로 이어갔다. 이 당시 진보주의자들은 예방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당시 보수와 진보는 모두 예방의 진정한 의미를 성숙시켜가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상상력의 씨앗은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 앨 고어 민주당 대선 후보 진영에서 나왔다. 그들은 ‘전진적 개입’이란 흥미로운 외교안보 노선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시 상상력이 결핍된 미디어와 지식사회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전진적 개입’이란 위기가 시공간적으로 압축적으로 진행되는 21세기에는 위기의 맹아가 발생하기 전에 근원적으로 예방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통찰을 던지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지혜는 이미 오래전 의료 분야에서 사후 약방문이 아니라 예방적 서비스에 더 큰 인센티브를 주는 관점으로 제기되어 왔다. 일부 서구의 선진적 기업들은 이미 예방적 상상력을 가진 리스크 지능을 오래전 화두로 제기한 바 있다. 오늘날 <인셉션> 등 영화의 주된 테마가 시공간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인식인 것도 같은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아직 위기 후 매뉴얼 대처의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다.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매뉴얼이 정밀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자연은 무자비하게 우리 문명의 가장 정밀한 성취에 대해 그 허약함을 테스트하고 있다. 결국 일본의 대재난은 이제 예측 가능한 사태에 대한 체계적 통제라는 근대적 매뉴얼의 시대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넘는 사태를 상상하는 역설적인 발상이 가능한 시대로 진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인류는 적정 수준을 넘어선 기술 문명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인간의 미묘한 감응력에 금이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에서 생태계 파괴 등 눈에 보이는 재난에 이르기까지 다차원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선진국의 대다수 정부들은 이 심각한 위기 앞에서도 상상력과 감응력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진정으로 자연과 인간 스스로에게 겸허한 이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기존 원전 정책 고수를 단언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하고 새롭게 상상하는 성찰의 시간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이 이런 지구적 시공간의 차원에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사회 전 영역에서 근대적 매뉴얼도 정착하지 않은 주먹구구식의 후진적 사회이다. 거기에다가 현기증 나는 21세기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에 대한 상상력과 예방적 감수성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 매뉴얼과 탈근대적 불확실성의 상상력 조직화라는 두 가지 과제가 동시에 우리 앞에 던져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 큰 대한민국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대선 주자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특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저 복지의 확대나 축소, 유러피언드림과 아메리칸드림의 평면적 대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이 재난이 그들의 관성적 사고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던져줄지 아직은 의문스럽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비록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일본을 다시 재건하면서 세계 시민들은 이를 전세계 문명의 전환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단지 원전 정책 검토나 안전 교육으로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 전 인류가 일본인과 함께 고통스런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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